소록도, 망가진 육신으로 일군 '당신들의 천국'
  • 전남 소록도·朴晟濬 기자 ()
  • 승인 1995.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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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80년 ‘지옥의 섬에서 인간의 땅으로’/관광지 개발 눈독, 환자 천여 명 ‘불안’…환자 · 봉사자 피땀의 결실 ‘위기’
이섬은 지도 위에 엄연히 대한민국 영토로 표시돼 있다. 그러나 이 섬은 지난 80년 가까이 일반인에게 줄곧 ‘상상의 섬’이나 ‘잃어버린 지상 낙원’쯤으로 기억돼 왔다. 또는 그 이름만으로도 일반인에게 소름을 돋게 하는 공포의 장소로밖에 기억되지 않았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1번지. 소록도로 알려진 이 섬이 일반인에게‘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곳’이 되어버린 까닭은 간단하다. 섬 전체가 한센씨병(나병) 환자들을 격리·치료하기 위한 시설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여러 번 바꾼 뒤 지금 통용되는 소록도의 또 다른 명칭은 ‘국립 소록도 병원’이다.

고흥 반도 끝머리의 작은 항구 녹동 부두에서 섬의 출입구인 도선장까지 배를 타고 5분이면 닿을 정도로 육지와 가까운 소록도는 일찍부터 ‘하늘이 내린 낙원’으로 이름 높았다. 소록도의 월평균 기온은 13.5℃, 연평균 강우량은 1500mm로 온난다습한 남해안 기후의 전형을 이룬다. 해안선을 따라 해수욕장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인 백사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적당하게 굴곡진 연안은 김·미역 같은 해산물을 양식하기에 알맞다. 섬에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멀리 제주도가 보일 정도로 시야가 탁 트인 언덕배기가 있는가 하면, 따가운 가을 햇살의 침입을 거부하는 은밀하고 호젓한 숲길도 있다.

하지만 원래부터 소록도가 낙원은 아니었다. 정작 소록도를 오늘날의 낙원으로 가꾼 것은 사람의 손길, 더 정확히 말해 그곳에서 배고픔과 강제 노역의 고통을 견디며 모진 병마와 싸워온 나환자(원생)들의 손길이다. 그들은 병들어 보기 흉하게 굽었거나 뼈마디가 썩어 떨어져 나간 손발을 움직여 벽돌을 굽고, 지붕을 이고, 길을 내고, 나무를 심었다.
채찍질·굶주림으로 죽어간 사람들

구라탑(救癩塔)이 서 있는 소록도 중앙공원 일대는 나환자들이 천국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땀을 쏟았는지 잘 보여주는 곳이다. 섬 한복판에 가꿔진 중앙공원은 반송 솔송나무 나한송 음나무 모새나무 정금나무 송양나무 큰밀나무 보춘화 따위 초목으로 곱게 단장되어 있다. 공원 주변에는 일제 때 병원 확장 계획에 따라 세워졌다가 지금은 너무 낡아 차례로 폐쇄되고 있는 병동과 병사, 부속 건물 들이 지붕에 이끼와 잡초를 얹은 채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고색창연한 색조를 자아낸다.

환자들은 때로는 환희에 가득 차서, 때로는 쓰디쓴 실의를 되씹으며 소록도에 ‘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이 땅을 천국으로 가꿔온 당사자들은 소록도를 천국으로 여기지 않는다. 작가 이청준이 이곳을 배경으로 쓴 소설에 이름 붙였듯이 소록도는 이곳에서 살다 죽어간 사람들과, 모진 병마를 이기고 지금까지 용케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는‘당신들의 천국’으로만 남아 있다. 그들은 공원을 조성하는 데 쓰이는 나무와 돌을 채찍을 맞아가며 날랐으며, 때때로 병든 몸으로 지탱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목도의 무게에 짓눌려 목숨을 잃었다.

소록도가 나환자들에게 천국과 지옥의 두 얼굴로 다가서기 시작한 때는 19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총독부가 총독부령 7호를 발동해 섬의 일부를 사들여‘자혜의원’을 세우고 전국의 나환자를 불러 모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상 전래의 생활 터전을 버릴 수 없다’고 버티는 섬 주민들을 위협해 땅을 매수했다. 자혜의원이 들어설 당시 1백50만평 넓이의 소록도 안에는 가옥 1백50여 호와 주민 9백여 명이 있었다.

비록 초대 아리카와(蟻川亨) 원장은 환자들에게 일본식 생활 양식을 강요하고 기상 직후와 취침 직전에 인원 점호를 실시했으며, 전문 27조로 된 ‘심득서’를 강제로 외게 하는 압제를 가했지만, 소록도에도 잠시 평화의 시대는 있었다. 제 2대 하나이(花井善吉) 원장 때가 바로 그 시기다. 하나이 원장은 환자들이 가족과 통신하거나 면회하도록 허용했으며, 3년제 보통학교를 세워 교육 받을 기회를 주었다. 그는 불구 환자들에게 비교적 건강한 환자를 붙여 신변 잡사를 돌보게 해주었고, 의복과 식량을 개선했으며, 환자 위안회를 조직하는 등 환자 돌보기에 성심을 다했다. 환자들은 29년 하나이가 세상을 떠나자 자발적으로 돈을 거둬 그를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다.
4대 수호 원장 ‘자기만의 왕국’ 건설

하지만 조선나예방령이 공포돼 자혜의원이 소록도갱생원으로 개칭되고, 나환자들에게 악명을 떨친 수호(周防正秀)가 제4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소록도는 병원 역사상 가장 혹독한 시기를 맞았다. 조선나예방령이란 35년 조선총독부가 나환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공포한 법령으로, 나환자에 대한 철저한 통제와 강제 수용을 주요 골자로 한다. 법령에 따르면, 나환자는 도지사가 직권으로 요양 시설에 강제 수용할 수 있었으며, 경찰서장은 나환자에 대해 시장이나 극장 등 대중이 모이는 장소에 출입을 금할 수 있었다. 요양소장에게는 입소한 환자들을 징계하거나, 감금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이 주어졌다.

33년 제4대 원장으로 취임한 수호는 이같은 막강한 권한을 지렛대 삼아 3차에 걸친 병원 확장 사업을 강행하면서 소록도를 ‘자신만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새로 도로를 내고 석축을 쌓는 등 수많은 구조물이 이 시기에 들어섰다. 하지만 새로 난 도로는 나환자들에게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었다. 나환자들은‘근로 봉사’라는 명분으로 병원 확장 사업에 강제로 내몰렸다.

건설에 소요되는 경비는 병원 확장 사업과는 별개로 환자들의 노임으로 충당했다. 갱생원 당국은 한달에 10일씩 이른바 ‘사은 갱생일 기간’을 정해 이 때 출역한 환자들의 노임을 강제로 병원측에 헌납시켰다. 환자 거주 지역과 직원 거주 지역의 경계에 철조망을 치고, 강제 노역을 거부하거나 병원측 조처에 반항하는 사람은 감금실로 보냈다. 감금실에 갇혔다가 나온 환자들은 병원 규칙에 따라 예외 없이 ‘단종 수술’(불임 수술)을 받아야 했다. 노예 상태를 견디다 못한 환자들 가운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섬을 탈출하려다가 익사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비극은 수호 원장이 한 환자의 칼에 맞아 살해된 42년까지 계속됐다.

45년 광복을 맞으면서 소록도는 역사상 가장 쓰라린 암흑기를 끝내지만, 소록도에 수용된 환자들이 오늘날처럼 사회로부터 마땅히 보호 받아야 할 환자로서 인간적 대접을 받기까지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47년 입원한 뒤 지금까지 소록도를 떠나지 않고 있는 김 아무개씨(78)의 증언은 광복 직후 소록도 나환자들이 겪은 고통을 짐작케 한다. “입원 당시 환자들은 한 방에 11~12명씩 생활했다. 이가 많아 옷을 비비면 이 죽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방이 너무 좁아 조금만 움직여도 다른 환자에게 불편을 줘 싸움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한국전쟁 직후 열악한 위생 상태와 더불어 소록도 나환자들을 괴롭힌 가장 큰 적은 배고픔이었다. 전남 영광 출신으로 스물세 살에 발병하여 56년 소록도로 들어왔다는 봉 아무개씨(74)는 비참했던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동네 노인들은 이왕 죽을 바에는 가족과 지내다 죽으라며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동생들 혼인길 막힐 것 같아 집을 나왔다. 처음 소록도에 왔을 무렵 환자들이 6천명이나 됐는데, 일반 환자들은 모두 가마니를 깔고 잤다. 그 때 병원측은 환자에게 납작밀 1홉·보리 3홉씩을 매일 배급했지만 배고픔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적은 양이었다. ”

‘소록도의 아버지’ 신정식 박사의 대개혁

소록도 나환자들의 수난은 한때 이 섬에서 의무관으로 봉직한 경력이 있고, 섬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광주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신정식 원장이 오면서부터 비로소 잦아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 사이 차윤근 원장(제10대·18대)과 조창원 원장(제14대·20대) 등 몇 사람이 번갈아 섬에 들어와 나름대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소록도는 신원장을 빼놓고는 결코 얘기할 수 없다.

그는 74년 원장에 취임하자마자 일본 군국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던 병원 운영 규정을 뜯어고쳐 환자 중심으로 원무를 개혁했으며, 나환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유실수 단지를 조성하고 산림 녹화를 실시했다. 그는 직원들의 부정으로 환자들에게 끊임없이 원성의 대상이 됐던 부식 조달 체계를 바꾸었으며, 나환자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데 종자돈 구실을 톡톡히 하는 금송복지회를 발족시켰다. 오늘날 1일 3교대로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거나 피고름 나는 상처를 소독하는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간호조무사를 양성하기 위해 정규 양성소(현 국립소록도부설 간호조무사양성소)를 세운 사람도 신원장이다.

나병 옮길 환자는 5명도 안돼

오늘날 소록도 나환자들의 생활은 일반인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없을 정도로 개선됐다. 가족과 친지 간의 면회·통신 연락은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이뤄진다. 일부 환자는 개인 전화를 설치해 바깥 세상과 아무런 불편 없이 교류할 수 있다. 또 음성으로 치유되어 전염될 염려가 없는 건강한 사람에 대해서는 사유가 타당하고 치료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길게는 15일 짧게는 5일 이내의 외출이 허가된다. 예전에 환자 지대와 직원 지대를 구분하던 철조망도 말끔히 치워져 환자들은 섬 안 어느 곳이든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됐다. 오대규 원장 체제가 들어서면서부터는 병원 개방 바람이 더욱 빨라져 일반인의 출입도 매우 자유로워진 상태다.

나환자들의 생활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변화는, 그들이 비록 불구가 되어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몸을 놀려 자립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실제로 괄목할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양돈과 양토를 열심히 해 지난해 소록도에서는 돼지 2천4백여 마리와 토끼 5백40 마리가 생산됐다. 부락 공동·개인 경작지에서는 해마다 마늘·쪽파·생강·호박이 많이 생산되어 외지로 팔려 나간다.

작고한 신정식 원장이 먼 앞날을 내다보고 강행한 유실수 단지 조성 사업도 최근 들어와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밤·밀감·모과·유자 나무에서 해마다 많은 열매가 쏟아져 환자들의 생활에 보탬을 주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유자나무에 거는 나환자들의 희망은 남다르다. 소록도 원생자치회 정상락 총무부장(48)은 “사업 초기에는 큰 재미를 못봤다. 그러나 차츰 요령이 생겨 외지 상인에게 유자나무를 임대하는 대가로 올해에만 1천6백만원을 벌었다. 나무가 더 자라고 있어 여기에서 거두어들이는 수입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반가운 현상은, 나환자들의 병세가 완전 치유 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호전되었다는 점이다. 94년 말 현재 소록도 병원에 수용된 환자 1천1백45명 가운데 양성 환자는 전체 환자의 2.4%인 28명밖에 안된다. 그 중에서 나병을 옮길 수 있는 ‘활동성 양성 환자’ 수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라는 것이 병원측 설명이다. DDS·람프렌·리팜피신 등 효과 좋은 치료약을 들여다 환자들에게 집중 투약해온 결과가 마침내 빛을 발한 것이다.
소록도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소록도 나환자들의 고난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신경조직이 비대해져 발생하는 통증을 막기 위해 진통제를 복용하거나 독성이 강한 주치약을 장기 투여하는데, 이로 인해 순환기·위장·신경계 등 갖가지 내과 계통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환자 대부분은 병세가 악화할 염려가 없는 음성 환자인데도, 궤양·백내장·각막염, 난치성 만성 중이염, 위축성 비염, 그리고 치주염, 악관절 이상증 등에 시달린다. 환자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주요 원인은 순환기계 질환인데, 94년 한 해에만 29명이 이 계통 질환으로 사망했다. 94년 사망 자 수는 84명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최근에 이르러 환자 연령의 고령화와 함께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불구도가 심한 환자가 늘어가는 데 있다. 현재 소록도 나환자의 평균 연령은 68.4세로 대부분이 남의 부축을 받거나 최소한 보조 기구를 사용해야 움직일 수 있는 불구자들이다. 이처럼 환자 고령화와 불구화는 환자에게나 병원측에 난감한 문제이다. 환자 수는 줄어들지만 도움 받아야 할 사람은 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소록도에서 30년 가까이 근속해온 박경자 간호과장은 “전에는 환자 가운데서 건강 상태가 양호한 사람을 생활조력원으로 뽑아 노약자들의 일상 생활을 돌보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활조력원 자신들이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이다. 현재 간호조무사들이 총동원돼 환부 소독과 투약 같은 일반 간호 업무 외에 과거 생활조력원이 했던 일까지 떠맡아 처리하지만, 환자들을 충분히 돕기에는 일손이 크게 달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 소록도 병원의 역할과 진로를 둘러싸고 섬 안팎에서 불붙기 시작한 논쟁만큼 소록도 나환자들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인은 없다. 논쟁의 촉발점은 ‘환자도 크게 줄었고 전체 나병 발생률도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떨어졌으므로 소록도는 앞으로 나환자 치료 시설이 아닌 다른 기능으로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70년대 중반까지 인구 천명당 0.91명이던 나병 유병률은 90년대 들어 0.5명 이하로 떨어졌다. 대체로 소록도 기능을 전환하자고 주장하는 쪽은 섬 바깥, 정확히 말해 소록도를 행정 관할권 안에 둔 전남 고흥군이다.

환자들 “이 섬을 떠날 수 없다”

특히 논쟁은, 지난해 국정감사 때 이곳에 지역구를 둔 한 국회의원이 보건복지부장관에게‘소록도를 관광지로 전환해 개발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으면서 뜨거워졌다. 그 뒤 고흥군번영회와 청년회의소 등이 그 같은 질의의 취지에 동조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자 소록도측, 특히 지난 80년간 생사의 갈림길에서 섬을 일궈온 환자측이 이같은 움직임에 반대하고 나섰다. 원생자치회 정상락 총무부장은 “80년간 피땀을 쏟아 일궈놓은 환우들의 보금자리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다. 더욱이 소록도는 나환자들 치료 시설로는 아직도 유일한 국립 기관이며, 지금도 천명이 넘는 환자가 마지막 뼈를 묻을 곳으로 생각하며 산다”고 주장한다.

91년 병원 개원 75주년을 맞아 소록도 나환자들은 선배 환우들의 유해가 안치된 만령당(납골당) 앞에 죽은 이를 추모하는 비문을 새긴 작은 비를 세웠다.

‘…해 지면 날새도 둥지 찾아든다는데…/ 한의 눈물 뿌리며 몹쓸 병마와 싸우다 찢기고 지친 육신/ 머리만 고향 쪽에 하고 이곳에 설잠드시니…/그 넋인들 어이 편히 잠드실까/하여 이곳 사슴의 가슴패기에 한서린 돌비 하나 세우노니/오가는 사람들아/오늘도 눈비 맞으며 흐느끼는 일만 넋의/경복을 합장코자 함이어이다.’

어쩌면 세상은 비문에서 암시하고 있듯 소록도에서 편히 눈 감고 싶어하는 나환자들의 마지막 소망마저 저버릴 수 있다. 소록도 나환자들이 80년간 피땀 흘려 낙원으로 만든 이 섬을 아직도‘당신들의 천국’으로만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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