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공간은 미국의 기술 식민지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8.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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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기술·표준 완전 장악, 정보보호산업 지배…해독 기술 독점도 노려
숨가쁘게 쏟아지는 정보 통신 분야의 기술적 성과들은 현실과 구분되는 가상 공간을 창조했다. 이 공간은 컴퓨터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인터넷 사용자가 늘어나면서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자체적으로 꾸려지던 개별 지역 전산망이 인터넷이라는 용광로에 녹아들면서 폭과 영역을 가늠하기 힘든 전자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국제 질서 흐름을 주도하는 미국은 이 가상 공간마저 지배하고자 한다. 실제로 정보 통신 시대가 열리면서 가장 눈부시게 발전한 곳이 미국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10년 이상 앞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술을 앞세워 정보 통신 기술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 표준은 세계 표준이다. 그 가운데 암호 기술과 표준은 미국이 가상 공간을 지배하기 위해 동원한 핵심 고리이다.

왜 암호 기술이 중요한가? 예를 들어 보자. 가상 공간에는 은행과 쇼핑몰이 생기고 있다. 기업들은 업무 효율성과 편리성을 높이기 위해 전자 상거래를 앞다투어 도입하고 있다. 인터넷에 흐르는 비밀 정보를 탈취한 해커가 이 정보를 악용해 정보 공급자와 수요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피해 사례가 자주 발생하면 전자 상거래망에 대한 신뢰성과 안정성이 깨져 가상 공간에서 비밀을 요하는 정보의 흐름이 차단되고 만다. 암호 기술에 대한 수요는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암호 기술을 이용한 정보 보호 제품을 생산하는 정보보호산업이 유망 산업으로 등장했다. 업체들은 앞다투어 암호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심지어 세계 검색도구 시장을 양분한 네스케이프 내비게이터와 인터넷 익스플로러에도 암호 제품이 탑재되어 있다. 정보 통신 선진국들은 정보보호산업의 국가 경쟁력을 키워 시장을 확보하고 고용을 창출하려 한다.
정보보호산업이 가장 발전한 나라도 미국이다. 미국 정부는 77년 대칭키 암호화 알고리듬(전산 처리 순서)의 표준인 DES를 제시했고, 미국 업체 RSA는 78년 공개키 암호화 알고리듬을 개발했다. 미국이 제시한 암호화 알고리듬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조사 기관인 TIS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을 제외한 29개 국가에서 생산되는 암호 제품 9백63개 가운데 2백81개가 DES를 사용한다. 또 미국에서 생산되는 암호 제품 9백63개 가운데 4백66개가 DES를 적용하고 있다. 효율성이 떨어져 정보 보호보다는 사용자 인증 분야에 많이 사용하는 공개키 암호화 알고리듬은 RSA가 산업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미국은 보안성이 다소 떨어지는 40비트 DES 제품의 수출을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인터넷 상거래 보안은 40비트 DES에 의존하고 있다. 정보 보호 성능이 우수한 56비트 DES에 대해서는 수출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암호를 해독할 복구키를 개발한 제품에 대해서만 수출을 허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터넷에서 오가는 비밀 정보를 해독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겠다는 미국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암호 기술 전문가들은 미국 정부가 DES 제품에 트랩 도어(뒷구멍)를 설치했다고 말한다. 트랩 도어란 암호 제품을 이용해 전자적으로 작성한 암호문을 푸는 단서이다. 트랩 도어는 암호화 알고리듬을 만든 이만이 알 수 있는 비밀 복구키라고 할 수 있다. DES에 설치된 트랩 도어를 이용하면 미국 정부는 DES 제품을 적용해 작성한 어떠한 암호문도 어렵지 않게 해독할 수 있다. 미국은 DES 알고리듬의 핵심 부분인 S박스를 공개하지 않았다가 지난 6월에야 공개했다.

보안성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진 DES 56비트는 지난해 ‘깨졌다’. RSA가 주최한 DES챌린지 2차 대회에서 25만 달러를 들여 만든 DES제품이 3일 만에 무장 해제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2000년부터 시행할 128비트 암호화 알고리듬 표준인 AES를 선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공모해 15개 AES 후보가 제안되었다. 이 가운데 국내 TCP/IP업체인 퓨처시스템 임채훈 박사가 개발한 크립톤이라는 알고리듬이 있다.

유럽, 미국 독주 막으려 애쓰나 역부족

128비트 암호화 알고리듬은 앞으로 30년 동안 깨지지 않을 정도로 보안성이 뛰어나다. 하지만 보안성이 뛰어난 것도 문제다. 범죄 집단이나 테러 조직이 이 암호 제품을 이용해 안전한 의사 소통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피아 조직은 마피아 신입 단원을 모집하는 암호문을 인터넷에 싣기도 했다. 이같은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국가나 국제 기구가 인터넷에 흐르는 비밀 정보를 해독할 키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네티즌들은 사생활 침해라고 반발하지만, 전산 정보에 대한 감청권은 정부가 가진 고유 권한임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은 이 감청권을 내세우며 AES 알고리듬 복구키를 가지겠다고 고집한다. 유럽과 일본이 이에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유럽은 중립적인 국제 기구가 복구키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제 기구에 복구키를 몰아주고 범죄나 테러 정보에 대해서는 영장을 첨부해 해독할 권한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의가 있을 때마다 미국과 유럽은 자기 주장을 내세워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캐스팅 보트를 쥔 일본은 미국 편이다. 일본은 아시아 표준을 차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팽팽하게 대치하지만 결국 세계 정보통신산업을 주도하는 기술과 환경을 가진 미국이 주도권을 확보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강하다. 한국정보보호센터 박성준 기반기술팀장은 “국제 기구가 창설된다고 하더라도 이 기구는 미국에 휘둘릴 것이다. 기술과 인프라 구축 비결을 가장 많이 가진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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