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오욕의 전파' 바로잡을까
  • 金恩男·盧順同 기자 ()
  • 승인 1998.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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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 자율 가로막는 정치 · 제도적 족쇄 여전…재정난 봉착, 경영 혁신도 큰 숙제
얼마 전 유행했던 우스갯소리 한 토막. 살아 있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려면 세 단계가 필요하다. 세 단계란 무엇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그 안에 집어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그러나 이 문제의 정답을 단번에 맞히는 이는 드물다. 발상을 전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고 KBS가 박권상씨를 신임 사장으로 맞은 것은 지난 4월20일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일제히 ‘국민의 신망이 두터운 인사’라고 박사장을 평가했고, KBS 구성원 또한 신임 사장에게 상당한 기대를 거는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1주일 만인 4월27일 KBS 사옥 현관에 ‘박사장은 왜 왔는가’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KBS 노동조합 명의로 된 대자보였다.

불과 1주일 사이에 KBS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실마리는 박사장의 취임사에서부터 풀 수 있다. 취임사에서 박사장은 KBS의 첫 번째 개혁 과제로 ‘공영 방송으로서의 독립성과 자율성 확고화’를 꼽았다. 코끼리를 집어넣으려면 냉장고 문부터 열어야 하듯, 정부의 개입과 간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야말로 KBS가 다시 태어나는 첫 관문임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박사장은 왜 <이제는 말한다> 방영 막았을까

그러나 박사장은 취임하자마자 이른바 ‘바자회 생중계 파동’에 휩쓸렸다. 이는 4월25일 국민회의가 주최한 ‘실업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를 방송 3사가 2시간씩 돌아가며 생중계하려 했던 것을 말한다. 이 계획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자 방송 3사는 결국 생중계를 취소했다. 녹화 중계 대상에 같이 올랐던 ‘김대중 대통령의 공무원 연찬회 강연’(4월27일 밤 11시) 역시 중계가 취소되었다.

‘집권 정당에 대한 충성 경쟁을 되풀이하려는 것이냐’라는 노조와 시청자 단체의 반발을 방송 3사가 수용한 셈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사장은 ‘(그런 행사는) 당연히 중계해서는 안된다’고 공언할 만큼 입지가 자유로웠다. 중계 계획은 그가 취임하기 전에 이미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이어 또 다른 지뢰가 박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사장이 취임하기 전인 2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극복과 공영 방송 체제 완전 구축’을 위해 출범한 KBS 노사공동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KBS 개혁을 위한 16개 항에 합의했다. 비대위는 또 KBS의 개혁 의지를 시청자에게 알릴 조처로 ‘개혁 실천 특별 제작팀’(개혁팀)을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설치하는 데 합의했다. 그런데 이 개혁팀이 만든 <이제는 말한다> 시리즈가 전파를 타기 전부터 문제를 일으켰다.

박사장은 애초 자신이 취임하기 전에 이루어진 노사 합의를 인정하고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최근 박사장이 <이제는 말한다> 일부 시리즈에 대해 방영 유보 입장을 밝히면서 노조와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71쪽 딸린 기사 참조).

박사장이 맞이한 또 하나의 시련은 인사를 둘러싼 잡음이었다. 박사장은 취임 다음날인 4월21일 본부장과 계열사 사장 인사를 전격 단행한 데 이어, 4월27일 실·국장 및 지역 총국장을 새로 임명했다. 이에 대해 노조가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본부장 6명을 임명할 때만 해도 노조는 자격에 문제가 있는 특정 인사를 제외하고는 이를 대체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특정 학맥 편중 인사’ 의견 엇갈려

그러나 실·국장 및 지역 총국장 인사에 이르러서는 ‘정도를 지나쳤다’는 것이 노조측의 주장이다. △문제 간부로 인사 조처된 자(ㅇ국장) △정년을 6개월밖에 남겨 놓지 않은 자(ㅎ국장) △대선 당시 편파 보도의 주역(ㄱ지역 총국장) △비민주적 발언·행동으로 노조의 탄핵을 받았던 자(ㄱ지역 총국장) 등이 이번 인사에 대거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특정 학맥에 대한 편중 인사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박권상 사장이 나온 전주고 학맥이 그것이다(전주고 24회인 박사장은 이 학교 출신 언론인들로 이루어진 친목 단체 ‘全言會’의 명예회장이기도 하다). 이번 인사에서 실세로 떠오른 전주고 출신은 전병채 보도본부장(35회), 이원군 편성실장(46회), 이상수 비서실장(45회), 유 균 해설위원(41회)이다.

이들 전주고 출신 인사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원래부터 KBS 안에 전주고 출신이 많았던 데다(전언회 회원만도 35명에 이른다), 능력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므로 무난한 인사였다는 평이 그 한 축을 이룬다. 노조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 전주고 출신 PD는 ‘전주고 출신의 약진이 눈에 띈다. 이같은 인사는 자칫 수구 세력으로 하여금 박사장을 공격할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며 우려했다.

이처럼 개혁 프로그램 방영을 둘러싼 공방과 인사 잡음이 얽히면서 취임 1주일 만에 ‘박사장은 왜 왔는가’라는 일갈이 터져나온 것이다. 당초 KBS 노조가 박사장을 받아들인 데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속셈이 작용했다. 지난 3월 말 노조는 KBS 이사회가 열리기도 전에 박사장 내정설이 언론에 보도되는 등 사장 인선이 여전히 정권의 개입에 따라 ‘선 내정 후 제청’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며 반발했다. 그러나 ‘정권으로부터 독립을 지킬 수 있는 개혁 성향을 지녔으면서 정권에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더 큰 저항 없이 박사장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실 박사장으로서는 정권으로부터의 독립뿐 아니라 경영 혁신 또한 3년 임기 중에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요즘의 다채널 무한 경쟁 구도에서 그 지위와 영향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는 것이 전세계 공영 방송이 직면한 현실이다. 시장 환경에 적응 못하고 재정난에 허덕인 나머지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 공영 방송이 외국에 허다하다. KBS도 예외는 아니다.
앞서의 취임사에서 박사장이 공영 방송으로서의 독립성·자율성 확립에 이어, KBS의 두 번째 개혁 과제로 ‘대담한 경쟁 원리 도입을 통한 경영의 효율성 제고’를 꼽은 것은 이같은 위기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최근의 경제난은 KBS의 위기를 더욱 앞당기고 있다. 경제난이 심해지면서 KBS는 올해 예산 1조원 가운데 광고 수익을 전년도와 비슷한 수준인 6천억원으로 잡았는데, 올 1/4 분기 광고 판매 추세대로라면 그 수익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 것 같다는 것이 KBS측 분석이다.

“땡김 뉴스 부활 조짐” 시청자 단체 비판

이런 상황에서 KBS가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다. 4월말 KBS와 다른 방송사들은 한국방송광고공사가 공익 기금 조성을 위해 따로 떼고 있는 광고 수탁 수수료율을 현행 19%에서 17%로 내려 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수수료율이 깎여도 그 효과는 극히 미미하다. KBS 재정이 궁극적으로 안정되기 위해서는 현재 4 대 6 비율로 되어 있는 수신료 대 광고 수익 비중을 역전시켜야만 한다고 KBS는 오래 전부터 주장해 왔다. 그것이 광고주의 입김에서 벗어나 시청률 경쟁에 휘말리지 않고 공영성을 강화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KBS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2천5백원인 수신료를 5천원까지 끌어올린다 해도 수신료 대 광고 수익 비중은 57 대 43을 넘어서지 못한다(이것도 광고 수익이 지난해 수준으로 유지되는 것을 전제한 수치이다). 문제는 수신료 인상이 과연 가능하느냐는 것이다. 공공 요금이 잇달아 오른 데 대한 국민 불만은 둘째 문제이다. 현재의 KBS 방송 내용을 갖고서는 86년에 이어 제2의 시청료 거부 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내부에서조차 제기되는 실정이다.

결국 관건은 KBS가 얼마나 공영 방송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느냐에 달린 셈이다. 김대호 박사(정보통신정책연구원)는, KBS가 공공 서비스에 충실하면서 대대적인 경영 합리화 정책을 편 다음 수신료 인상을 요구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이를 위한 ‘바닥 고르기’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 중이다. 지난 2월 KBS는 ‘IMF 위기 극복을 위한 신편성’을 표방하며, ‘2TV의 1TV화’를 선언했다. 다시 말해 상대적으로 오락성이 강한 2TV에 1TV의 완성도 높은 교양 프로그램을 이식하고, 1TV는 1TV대로 공영성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완전한 공영 방송 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편성 이후 KBS가 과연 자체 선전대로 ‘영국의 BBC나 일본의 NHK 같은 고품격 방송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일단 KBS2는 신편성으로 드라마와 연예 오락 프로그램을 18편 가까이 줄였다. 그러나 아직 2TV를 명실상부한 교양 채널로 분류하기에는 역부족이며, <체험, 삶의 현장> <긴급 구조 119> 같은 인기 교양 프로그램을 1TV에서 2TV로 넘긴 것 또한 광고 수주를 의식한 편성으로 보인다는 것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매스컴 모니터 팀의 분석이다.
모니터 팀은 또 신편성 이후에도 △시청률을 의식한 맞대응 편성(주말 드라마 <아씨>) △포장만 바꾼 오락 프로그램 부활(<브라보 신세대>) △드라마와 유사한 프로그램 신설(<공개 수배 사건 25시>) 등 문제점이 고쳐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채널 정책을 바로 세우지 않는 한 이같은 문제는 되풀이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김승수 교수(전북대·신문방송학)의 지적이다. 지금처럼 2TV를 어정쩡하게 ‘가족 문화 채널’이라는 이름으로 두면 전파만 낭비할 뿐이라는 것이다. 김교수는 제작 기능을 갖춘 지역 연립 채널, 또는 경제 위기 극복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경제 전문 채널로 2TV를 독립시키라고 제안했다.

‘공영 방송의 꽃’이라 할 보도 프로그램에서도 KBS는 신편성 이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시청자 단체인 매비우스(매체 비평 우리 스스로 하기 모임)는 지난 4월17일 ‘KBS 땡김 뉴스 부활 조짐’이라는 제목의 모니터 보고서를 내놓았다. KBS <9시 뉴스>가 최근 대통령의 일상적인 업무에 지나지 않는 내용을 연일 주요 기사로 채우고 있다는 지적이 담긴 보고서였다.

이를테면 4월13일 KBS <9시 뉴스>는 뉴스 시작부터 여섯 번째 꼭지까지 ‘김대통령이 이러이러한 내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정책 발표도 아닌 업무 보고 현황을, 대통령 육성까지 곁들여 내보낸 것이다. 다음날도 <9시 뉴스>는 ‘국무회의에서 김대통령이 자동차 주행세 재도입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을 머리 기사로 보도했다. 이 날 다른 방송사의 머리 뉴스는 ‘구조 조정 기금 10조원 조성’이었다.

청와대·언론·재벌 등 성역 깨뜨리기 급선무

새 정부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듯한 KBS 보도 태도는, 정부 정책의 난맥상을 무비판적으로 보도하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매비우스의 지적이다. 종군 위안부 보상금을 정부가 대신 지원하기로 했다는 4월14일 기사가 대표적이다. KBS는 ‘배상 문제를 정부가 앞장서 매듭짓고, 한·일 양국의 미래 지향적 관계 구축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려는 정부 의지는 다음 국무회의에서 확정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다른 방송사가 ‘과거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에 대해 우리가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며 국무위원·관련 단체 들의 반발을 소개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박권상 사장 체제를 맞아 진정한 공영 방송으로 거듭나려는 KBS 앞에는 풀어야 할 난제가 코끼리만한 덩지로 쌓여 있다. 이것을 ‘개혁’이라는 냉장고에 넣으려면 방법은 하나, 냉장고 문을 열 수밖에 없다.

김승수 교수는 이를 ‘과거의 제도적·정치적·심리적인 족쇄를 모두 풀어 버리는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청와대·언론·재벌 같은 과거의 성역을 깨뜨리고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KBS의 개혁은 비로소 가능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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