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공간에서 싹트는 새로운 정치 실험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0.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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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공간 새로운 정치 실험 활발 … 분열 지향적 여론 부추기는 역기능도
지난 9월19일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서울 ㄱ대학 3학년 윤 아무개씨를 구속했다. ‘성수여중 폭력사건’ 가해자 김 아무개양 명의의 글이 윤씨의 작문으로 밝혀졌기 때문.

“울아빠의 자유총연맹은 아무도 못건들여. 그리고 울아빠가 그러는데 담 대통령은 이회창씨가 된다고 하셨어. 이회창씨는 울아빠 단체 편이라고. 앞으로 2년만 버티면 울아빠는 진짜 아무도 못건들여. 병신들아.”

이 짧고 유치한 글이 인터넷을 달군 40여일 동안 가해자 김양의 아버지는 자유총연맹에서 불명예 퇴진했고, 엉뚱하게 불똥이 튄 한나라당은 네티즌들의 격렬한 비난 속에 공식 해명까지 하는 촌극을 빚었다. 이 사건은 익명성의 함정에 빠진 사이버 여론이 얼마나 추악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끝났다.

지난 6월 말 청와대 게시판에는 ‘의약 분업에 대한 네티즌들의 투표 결과’라는 글이 올랐다. MBC 홈페이지에서 실시했다는 투표 결과는 ‘빨리 시행되어야 한다’보다 ‘제도 보완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가 압도적으로 많게 나타났다. 당시 여러 매체가 실시했던 일반 여론조사와 판이한 이 투표 결과는 어찌된 영문일까? 비밀의 열쇠는 사이버 의쟁투의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이버 의쟁투라는 인터넷 의사 모임이 각 정당·언론사·사회단체의 사이트를 매일 모니터하면서 ‘사안이 생길 때마다 신속하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대응했기 때문. 이 사례 또한 특정 집단에 의해 사이버 여론이 얼마든지 휘둘릴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준다.
익명의 함정에 빠진 사이버 여론

이런 극단적인 사례를 제외하더라도 사이버 여론이 생산되는 현장들은 대체로 너저분하다. 각종 게시판과 토론방에 올라오는 글은 대부분 냉소와 욕설, 지역 감정 선동, 근거 없는 폭로 따위이다.

천리안 토론방에는 7월26일∼8월29일 민주당의 국회법 날치기 통과를 두고 1백72건의 글이 올라왔다. 그러나 국회법의 문제나 날치기 통과에 대한 이성적인 토론은 거의 없었다. 오직 반DJ파와 친DJ파의 욕설 섞인 감정 다툼만이 계속되었다.

6월20일부터 7월17일까지 지속된 ‘의사 폐업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토론은 의견 개진 건수가 3천2백12건에 달할 정도로 격렬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욕설과 냉소만 난무했을 뿐, 의약분업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없었다.
‘대안적 매체로서의 PC 통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윤영철씨는 “사이버 공간의 토론은 합의 지향적이 아니라 분열 지향적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사이버 여론의 특성 때문에 정치권과 학계 일부에서는 인터넷 민주주의를 ‘쓰레기 민주주의’로 취급한다. 무소속 정몽준 의원은 “여론이 법을 지배하게 되며, 선동자가 권력을 잡게 되는 직접 민주주의는 중우(衆愚) 정치일 뿐이다”라며 완강한 반대 입장을 폈다. 이진우 교수(계명대·철학)도 “사이버 공간은 이미 의사 소통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사적인 의견과 신념의 배설구로 전락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비관론자들에게 인터넷 민주주의는 태어나기도 전에 장례 치를 준비부터 해야 할 처지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낙관주의자들에게 시선을 돌려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인터넷 민주주의 전도사 딕 모리스는 그의 책 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만약 토머스 제퍼슨이 살아 있다면 인터넷을 좋아했을 것이다.’ 모리스가 직접 민주주의의 상징적 인물인 제퍼슨을 끌어대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인터넷 민주주의=직접 민주주의’라는 등식이다. 그는 성급하게 의회의 영향력 상실과 정당 쇠퇴를 예언하기까지 한다. 그에게 인터넷은 다 죽은 민주주의를 구원하는 새로운 복음이다.

민주당 ‘반란’ 주도 의원들에 격려글 쇄도

과연 인터넷이 대의 민주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 질서의 부화기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인터넷 민주주의라는 말이 생소한 것처럼, 전망 또한 아직은 어렵기만 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미 부분적이지만 현실이기도 하다. 온라인 투표나 전자 청문회처럼 새로운 정치 실험들이 나타나고 있고, 순전히 인터넷 선거운동을 통해 주지사에 당선된 제시 벤추라 같은 인물도 나왔다. 이제 ‘권력은 TV에서 나온다’는 말을 ‘권력은 인터넷에서 나온다’로 바꾸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국내에서도 징조가 보이고 있다. 지난 4·13 총선 때 총선시민연대가 사이버 공간을 통해 낙선시킬 대상자의 명단을 공개한 이후 시민단체 사이트들의 접속 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몇몇 정치 관련 사이트들은 활발한 정치 토론장 구실을 하고 있다. 광주 술판의 주인공인 민주당 386 세대 의원들, 국회법 날치기 주역인 천정배 의원, 귀경길에 역주행한 박상천 민주당 최고위원의 홈페이지는 한동안 비난 여론으로 몸살을 겪었다. 송 자 전 교육부장관·박지원 전 문화관광부장관은 네티즌들로부터 맹타를 당했고, 결국 낙마했다. 반면 최근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국정 운영 방식에 직격탄을 날린 김태홍·정범구·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초·재선 의원 13명의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소신 행동을 격려하는 글들이 연이어 올라왔다.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이나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인터넷 여론 덕을 톡톡히 본 인물로 꼽힌다.

이런 현상을 이끌어낸 것은 물론 정보통신 환경의 발달 덕분이다. 한국인터넷정보센터의 집계에 따르면, 1999년 말 현재 국내의 인터넷 인구는 천만명을 넘어섰다. 네티즌의, 네티즌을 위한, 네티즌에 의한 정치가 토양은 닦여 있는 셈이다.

네티즌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정치권에도 변화 바람이 불고 있다. 딱딱하고 권위적이던 청와대 홈페이지(www.cwd.go.kr)는 지난 6월 환골탈태했다. 대통령 동정과 각종 회의 자료가 거의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었다. 매달 한 차례씩 이벤트를 열어 경품을 주기도 한다. 이런 노력 덕분에 작년까지 2천∼3천 회이던 하루 접속량이 최근에는 1만4천여회로 늘어났다. 청와대는 9월 말 접속 5백만 건 돌파 기념으로 대대적인 경품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의 백미는 역시 게시판. 정국 파행, 한빛은행 사건, 경제 위기 등으로 시국이 어지러운 요즘 청와대 게시판은 비판과 제언으로 후끈 달아올라 있다. 이재학씨는 ‘당신의 강경한 입장에 국민들은 한심해 합니다. 이젠 욕심을 버리시고 당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십시오’라며 김대통령에게 유연한 정국 대처를 조언했고, 김광석씨는 ‘요즘 민심이 어떠한지 아십니까. 정말 이 나라에 살기 싫은 국민들 천지일 겁니다’라며 직설적인 비난을 늘어놓았다. 이재학씨는 ‘민주당이 선택할 진짜 배수진은 특검제’라며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것만으로 인터넷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이르다. 인터넷 민주주의의 핵심인 쌍방향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게시판은 시민들의 배설구일 뿐, 정치권은 정치권 논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방적이지만 인터넷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그나마 청와대나 정당, 몇몇 의원의 홈페이지가 고작이다. 인터넷 민주주의의 실질적 주체인 의원들의 경우 15대 때 인터넷 홈페이지를 가진 의원이 89명에서 16대 때 1백87명(68.5%)으로 늘어났지만 이 중 정기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홈페이지는 30개 남짓이다.

민주당 김근태 의원(www.ktcamp.or.kr)은 자유 게시판에 올라온 의견에 대해 꼬박꼬박 답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민주당 장영달 의원(ydal.or.kr)은 ‘리베로’라는 웹진 형태의 홈페이지에 외부 필진을 동원해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한나라당 손학규 의원(www. hkvision.pe.kr)은 저서 <진보적 자유주의>의 요약본과 각종 정책 자료를 홈페이지에 올렸다. <한국전자민주주의의 가능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www.kho.or.kr)의 자료실에는 벤처 기업 관련 문서 자료 1백60여 건이 올려져 있다. 민주당 허운나 의원(www.unna.or.kr)은 자신의 상임위 발언 전문을 공개하고 있다. 한나라당 김영춘 의원(www.yckim.or.kr)은 정보통신위원회 관련 정책과 의정 활동 사항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민주당 김영환 의원(www.kyh21.com)은 정기적인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회원들에게 의정 활동 소식을 담은 이메일을 보내고 있다. 김민석·임종석 의원 등 386 세대 의원들도 대부분 홈페이지를 잘 관리하고 있다.
아날로그 의원, 잠자는 홈페이지

이들 일부를 제외한 의원들의 홈페이지는 일방적인 홍보용이거나 장식용이다. 프로필·의정 활동·게시판·민원실 따위가 형식적으로 배치되어 있을 뿐 최소한의 읽을거리도 제공하지 못하는 곳이 수두룩하다. 국회의원 홈페이지를 분석하고 있는 사이버문화연구실 민경배 실장은 “인터넷 민주주의의 핵심은 쌍방향성이 얼마나 잘 되고 있느냐에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회의원 홈페이지는 일방적인 홍보 사이트로만 운영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사이버 공간에서 토론 문화가 실종된 1차 책임은 네티즌이 져야 한다. 그러나 정치인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고 민경배 실장은 말한다. “국내 최초의 전자 민주주의 사이트였던 사이버 파티가 사이버 공청회, 사이버 의원 지원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네티즌과 정치인 간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여론 수렴과 입법안 마련을 시도했으나 정치인들이 외면해 대부분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다.” 즉 정치인이 적극 참여하지 않는 한 인터넷 민주주의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지적이다.

‘클릭’은 출발, 중요한 것은 뜨거운 가슴

물론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인터넷 민주주의를 향한 시도들이 새로운 정치 지평을 열어준 것만은 분명하다. 한나라당 김영춘 의원은 인터넷 민주주의가 앞으로 대의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의미 있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전자 민주주의 실험들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민주당은 지난 8월 전당대회 기간에 사이버 토론회를 인터넷으로 생중계한 데 이어 사상 최초로 전자 단말기 투표를 실시했다. 중앙선관위도 수년 전부터 전자 투표에 대비해 기술적 연구를 했고, 최근 시제품 개발까지 마쳤다.

문제는 인터넷 민주주의가 정보 통신 기술 발달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전자민주주의가 오고 있다>를 쓴 박동진씨(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는 “사이버 공간의 민주주의가 아닌, 사이버 공간을 매개로 인간들을 묶어내는 참여 민주주의가 더욱 중요하다”라고 지적했다. ‘클릭’은 출발일 뿐, 인터넷 민주주의에도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뜨거운 가슴’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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