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 기로에서 구조 조정 '몸살'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8.05.2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사’ 막다른 길, 신속한 구조 조정 불가피… 자금 확보·관치 악습 벗기 ‘넘어야 할 산’
지난 4월 말 공인회계사 수십 명이 동시에 세 은행에 들이닥쳤다. 시기로나 규모로나 예삿일은 아니었다. 정기적인 감사라면 회계법인 쪽이 자신들을 고용한 은행에 아무래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으나, 이번엔 달랐다. 이 때문에 은행 곳곳에서는 사소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럴 만도 했다. 이 공인회계사들은 은행의 생살 여탈권을 쥐고 있다. 이들은 4월 중순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위원장 이헌재)가 정한 일정에 따라, 5월 말까지 12개 은행의 경영 상태를 진단한다. 대상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자기자본비율이 국제결제은행(BIS)이 권고하는 8%에 못미치는 은행들. 은행의 존폐와 통폐합 여부는 6개 회계법인의 경영 진단을 토대로, 은행이 제출한 경영 개선 계획서에 대한 평가 작업을 거쳐 확정된다.

앞으로 3∼4개월 이내에,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백년에 이르는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 은행들의 운명이 판가름난다. 적어도 은행 구조 조정 작업을 진두 지휘하고 있는 금감위의 뜻대로만 된다면 말이다. 은행 두 곳의 경영 진단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삼일회계법인의 한 회계사는 “진단 대상이 되는 은행에서는 정치권과 경제 관료가 주도한 관치 금융으로 인한 피해를 왜 자신들만 뒤집어써야 하느냐 하는 억울함, 그래도 이번 위기를 넘기고 살아 남아야 한다는 비장감이 묘하게 뒤범벅되어 있다”라고 전했다.

그 원인을 누가 제공했건 간에, 은행의 부실이 현재 경제 위기의 핵심인 것만은 분명하다. 은행들은 부실 대출과 자기자본 부족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신용 등급 평가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세계적인 신용 평가 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의 아·태 책임자 어니스트 내피어 씨는 “우리가 신용 평가를 맡고 있는 7백개 금융기관의 평균 신용 등급은 A인데, 한국에서 가장 우량하다는 주택은행이나 국민은행도 BB+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전체 13개 등급 구분 가운데 A는 6 등급, BB+는 11 등급이다).

만일 이렇게 어려운 은행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기업에 빌려준 돈을 무자비하게 회수하고, 이로 인해 기업들이 무너지면, 이는 다시 은행의 부실 대출금을 늘리는 공멸의 악순환이 시작될 수도 있다. 이미 악순환이 시작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흔히 은행 대출금이 얼마나 건전한가를 나타내는 부실 채권 판정 기준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국에서는 6개월 이상 연체된 경우만 부실 채권으로 간주하나, 선진국은 3개월 이상 연체한 채권(무수익 여신)까지 포함한다.

선진국 기준을 적용했을 때, 지난해 말 기준으로 한국 은행들의 총여신에서 무수익 여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6% 안팎. 그 후 공식 통계치는 발표되지 않았지만, 국내 외국 증권사의 최근 추계치에서는 10%에 달한다. 그 사이 그만큼 늘었다는 얘기다. 외국 증권사 국내 지점의 한 증권 분석가는 당분간 무수익 여신이 분기 별로 약 20%씩 증가하게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비중은 커지리라고 내다본다.

물론 시각에 따라서는 은행의 구조 조정보다 실업 문제가 더 화급한 현안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장기적으로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인도적 차원에서 보거나 또 실업자가 늘면 사회적 불안이 야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실업 대책은 중요하다. 그러나 만일 은행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경제 전체가 흔들린다면, 단기적인 실업 대책조차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 정운찬 교수(서울대·경제학)의 말이다.
은행 문제 풀리면 재벌 개혁도 풀린다

외환 위기라는 급한 불을 끄고 난 4월 중순 이후 경제 정책 기조를 둘러싸고 계속되어 온 이 논란은 최근 완전히 정리된 듯한 인상을 준다. 지난 5월10일에 있었던 국민과의 대화 자리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은 금융과 재벌의 구조 조정을 우선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에 따라 위기 해법도 은행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일부 두뇌 집단 사이에서 은행이 먼저냐 재벌이 먼저냐는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현재는 은행의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재벌 문제도 풀리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렇다면 은행의 구조 조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크레디트 스위스 퍼스트 보스턴 증권사 서울지점의 윤 석 이사는 “극도로 부실해진 은행은 문을 닫고, 살릴 수 있는 은행들은 부실 대출금을 정리해 주어 자기자본을 늘리 것으로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금융 위기를 겪었던 다른 나라의 경험을 통해 볼 때, 이 점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은행 구조 조정을 신속하고 과감하게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뿐이다.

전망은 엇갈린다. 특히 외국인들은 한국 정부가 은행의 구조 조정을 미적거린다는 인상을 갖고 있다. 미국의 월 스트리트에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는 한누리증권 김석기 사장은 “새 정부는 은행 구조 조정의 방향을 잘 잡았으나, 이를 단호하게 실천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지는 못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외국인 기관 투자가가 이탈해 주가가 지난해 환란 직후 상황까지 다시 떨어지고, 제2의 외환 위기 가능성(63쪽 기사 참조)까지 점쳐지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은행을 손 대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드는 막대한 자금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자기자본 비율이 8%에 미달한 12개 은행은 이미 경영 개선 계획서를 금감위에 제출했다. 계획서에 따르면, 이 은행들은 유상 증자(2조1천억원)와 후순위 채권 발행(1조5천억원), 외자 유치(6천억원) 등을 통해 4조2천억원 가량을 조달하려 하고 있다(왼쪽 표 참조).

그러나 금융 전문가들은 유상 증자나 후순위 채권의 경우 국내 증시에서 소화하기가 불가능하고, 외자 유치도 외국 자본의 참여를 유도할 만한 유인책이 없다고 본다. 즉 은행이 정상화에 필요한 자금을 대부분 공공 자금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은행 문을 닫을 경우 예금자들에게 예금을 대신 지급하며, 회생 가능한 은행에는 증자를 시켜 주고 부실 채권을 떠안기도 해야 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금융연구원은 그 비용을 각각 67조원과 63조원으로 추산한 바 있다.

그런 막대한 돈을 어떻게 조달할 수 있을까. 한국개발연구원은 채권을 발행해 구하라고 권고했고, 금융연구원은 공기업을 매각해서 조달하라고 주장했다. 현실적인 방안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동원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정부 재정에서 직접 조성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바로 실업 대책 재원과 금융기관 구조 조정 기금 가운데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하느냐 하는 경제 정책 기조와 관련이 깊은 대목이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2명은 청와대와 금감위의 지시로 태국의 은행 구조 조정 현황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태국이 한국보다 과감하게 은행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국제 금융계의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 태국은 15개 은행 중 이미 부실해진 4개 은행을 100% 감자(減資)해 공기업화한 후 곧 민영화할 예정이다. 한국개발연구원측은 이 보고서에서 한국도 신속히 태국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한국의 여건 태국보다 훨씬 나쁘다”

이 보고서 내용이 타당하기는 하지만, 태국과 한국의 근본적인 차이들을 간과했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은 태국에 비해 경제와 은행의 규모가 훨씬 크다. 게다가 부동산 부문의 거품이 발생한 태국에서 은행에 손을 댄다는 것은 부동산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제조업의 일부를 포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이 훨씬 조건이 나쁘다.” 서울대 정운찬 교수의 설명이다.

관치 금융에 따른 정치권·경제 관료·은행 간의 끈끈한 유대 관계도 장애물이다. 과거 권력 상층부의 압력을 거부하지 못했던 은행 경영진은 이제 생존을 위해 그들에게 다시 기대고자 할 것이다. 최근 일부 은행은 생존 전략 차원에서 노골적인 줄 대기를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한국에는 태국과 달리 간단치 않은 요인들이 여기저기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금감위 이헌재 위원장은 <시사저널> 취재진과의 면담에서 “여건이 아무리 어려워도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라고 결의를 다졌다. 잡음이 일 것을 예상하면서도 늘 은행 구조 조정 일정(60쪽 표 참조)과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는 것도 구조 조정을 다그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금감위는 경영 진단의 경우도 일정을 앞당겼고, 그 결과가 나오는 대로 시범적으로 정부 지분이 많은 은행들을 합병시켜 가능한 한 빨리 3∼4개 초대형 선도 은행을 만들 계획이다. 그 과정에서 은행 경영진에 대한 물갈이가 단행될 수도 있다. 은행 구조 조정과 관련해 분명히 전망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늦추면 늦출수록 국민이 부담할 비용이 훨씬 더 커진다는 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