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사정 “난 알아요” 아껴 쓰기 “혼자서도 잘해요”
  • 宋俊 기자 ()
  • 승인 1998.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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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눈에 비친 IMF 세태/나라 사정 “난 알아요”, 아껴쓰기 “혼자서도 잘해요”… 상황 인식은 ‘빈익빈 부익부’
외환 위기로 말미암은 국가적 혼돈이 날로 극심해지고 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경제의 톱니바퀴가 엇물리고, 정치 · 사회 · 도덕의 기틀이 눈에 띄게 허물어지는 실정이다. 혼돈의 시대에 미래는 있는가. 민족의 미래를 담보하는 어린이의 눈에 요즘의 사태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을까, 예절과 허식으로 포장된 어른의 위장 어법을 걷어낸 어린이의 눈으로 IMF 한파에 휘청거리는 이 시대의 진실을 들여다본다.<편집자>

‘나는 IMF가 좋다. 아빠가 일요일에 골프장에 안갈 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빠와 공놀이를 해야지.’ (이주은 · ㄱ초등 2년)

‘오늘은 은행놀이를 했다. 동영이가 ○○은행을 하고 내가 한국은행을 했다. 그런데 ○○은행이 망해서 한국은행의 관리 하에 들어갔다. 5시쯤부터 한국은행이 적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주 재미있었다.’ (문호진 · ㅅ초등 3년)

‘우리집 분위기가 어쩐지 어수선하다. 자다가 얼핏 부모님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아버지 회사가 어려워져서 걱정이었다. 아버지 힘내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 대신 행동으로 보여드려야겠다.’(주율휘 · ㅊ초등 4년)

‘아파트 입주를 못하게 되었다.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건설회사의 건설비가 바닥이 나서 조합측과 돈 문제로 싸움이 붙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임시로 부모님 친구 집에서 살고 있다.’(박기화 · ㅂ초등 5년)

‘내가 너무나 밉다. 돈덩어리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급성 목감기에 걸리고 만 것이다. 한밤중에 아빠께서 피곤한 몸으로 약을 지으러 가셨다. 왜 나는 가족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이 어려운 때에 걱정이나 끼치고 돈을 길바닥에 흘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백지혜 · ㅈ초등 6년)

초등학생들의 일기이다. 일기 속의 세상은 이미 삶의 격전장이다. 세파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아이들은 온몸으로 ‘게임의 법칙’ 을 익히고 있다. 세상을 읽는 아이들의 눈높이는 훌쩍 웃자라 벌써부터 어른과 키재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아이들이 경제 실정을 이만큼 감지하게 된데는 나라의 상황을 기민하게 가르친 학교 교육의 덕이 크다. 지난해 말부터 학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IMF 시대의 실상을 전하려 애써 왔다(37쪽 상자 기사 참조).

그렇지만 급변하는 일상 속에 자신을 대입하여 그에 걸맞는 역할을 찾아가는 아이들의 적응력은 학교의 훈계 차원을 넘어선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불우한 현실을 인지하고, 기꺼이 그 불우에 몸을 던져 나름의 ‘실전 경제학’ 을 체득해낸 것이다.
어린이에게 전염된 ‘실직 스트레스’

실제로 IMF 한파의 실체를 현실에 가장 가깝게 인식하고 있는 측은 서민층 아이들이다. 임금 삭감과 정리 해고의 충격이 맨 먼저 발생한 계층에서 난세의 학습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들의 일기에서는 급격한 생활의 변화가 중산층이나 고소득층 학군 아이들보다 두드러지게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 봉급이 줄어들자 어머니께서 직장을 구하러 매일 발이 닳도록 걸어 다니신다’' (서진호 · ㅂ초등 5년).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아버지가 신경질을 자주 내신다. 아버지 앞에서 웃음을 짓고 싶은데 왠지 가까이 가기만 하면 잘 안된다.’ (박광일 · ㅂ초등 5년). ‘일이 많아 매일 늦으시던 아빠가 요즘 일찍 들어오신다’ (김히아 · ㅊ초등 4년). ‘늘 집에서 저녁을 드시던 아버지께서 요즘에는 새벽 2~4시에 퇴근하신다. 밤에 부모님 말씀에 살짝 귀를 기울여보면 모두 고통스런 이야기뿐이다’ (한승규 · ㅈ초등 6년). ‘엄마 아빠가 돈 때문에 싸우셨다. 아빠가 외박하는 날도 많아졌다’ (김현호 · ㅈ초등 6년). '엄마가 일자리를 잃었다. 누나도 실직을 했다’ (김낭극 · ㅂ초등 5년).

지난 2월 초 ‘아버지의 전화’ (공동대표 정 송)가 수도권 초등학교 4 · 5 · 6학년 학생 6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51%가 ‘부모의 해고 · 실직 · 퇴직 걱정을 들어 본 적이 있다’ 고 대답했다. ‘실직 스트레스’ 가 이미 초등학교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이들이 느끼는 의식주의 변화도 매우 구체적이다. 우선 가족 식탁의 반찬이 김치와 된장국으로 압축되고, 냉장고가 텅 비게 되었다. ‘TV는 1시간 이상 보지 않는다. 세탁기 대신 손빨래를 한다’ (고혜경 · ㅂ초등 5년). 학교 급식 분량도 턱없이 줄었다.

피아노 · 컴퓨터 학원 따위 과외 활동과 학습지 구독을 멈추는 일도 다반사다. 가슴이 미어지지만 부도들은 내키지 않는 명분을 앞세웠다. ‘복습이 더 중요하다. 이제부터 집에서 복습해라.’ 그럼에도 아이들 상당수는 부모가 내세우는 명분과 그 뒤에 가려진 부모의 아픔을 함께 읽고 있었다.

한달에 2만~3만 원씩 비용이 드는 학습지를 5천원 안팎의 문제집으로 바꾼 경우는 드물지 않다. 지난해 학습지에 표기한 정답을 지우개로 싹싹 지워 동생에게 물려준 어린이도 있다. 조인규 어린이(ㅊ초등 5년)는 아ㅖ 아마추어 출제 위원으로 나섰다. 동생을 위해 매일 과목 별로 문제를 출제해 학습지를 만드는 것이다.

부잣집 아이들은 내것 챙기는 것이 절약?

작은 옷이나 진력이 난 게임기를 바꾸어 쓰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새것 타령도 이젠 끝!’ (조훈규 · ㅂ초등 5년)이다. 새 학년이라고 해서 새 공책을 쓸 꿈은 처음부터 꾸지 않는다. 전에 쓰다 남은 부분부터 새로 적거나, 백지 부분을 떼어내 새 공책을 묶는다. 다 쓴 공책은 스크랩용으로 활용한다. 몽당 연필도 부활했다. ‘지금 일기를 쓰고 있는 연필이 너무 작아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오범순 · ㅅ초등 6년).

외국산 유명 상표와 국산품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도 진지하기 그지없다. ‘내 가방은 유명한 ○○○○가방이다. 그런데 요즘 이 가방을 메고 다니면 손가락질을 받고, 안 메고 다니면 따돌림을 받는다. 철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닌데 왠지 불안하다’ (송윤미 · ㅊ초등 6년).

이처럼 현실 속에서 IMF 난국을 체득하고 있는 저소득층 아이들에 견주어 고소득층 자녀들은 IMF 한파의 영향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들은 대체로 언론에 보도된 개념으로, 또는 일반인 사이에 회자되는 경제 상식 수준에서 최근의 상황을 인식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 테면 일기의 대부분이 ‘외국에서 빌려온 돈을 갚지 못해서’ 혹은 ‘어른들이 돈을 낭비해서’ IMF 사태가 발생했다는 모범 답안형의 발상에 머무른다. IMF 이후 나타난 생활의 변화 역시 ‘네 켤레나 되던 신발이 두 켤레로 줄었다’ 든가 ‘승용차 여러 대 가운데 일부만 굴리게 되었다’ ‘치약을 아끼려고 이를 닦지 않았다’ ‘외국 영화를 보지 않겠다’ ‘간식이 줄었다’ 는 식으로 표현된다. 외식할 기회가 줄었다든가 해외 여행 · 친척집 ·스키장 따위를 자주 못 가게 되었다는 내용도 빈번히 등장한다. 외국 여행을 다녀오고도 자랑하기를 쑥스러워하는 점이 색다르다면 색다르다.

학교가 주도한 덕분에 아껴 쓰기 · 쓰레기 분리 수거 · 폐품 활용 등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서도 아이들의 행태는 어른의 인식과 붕어빵 관계에 놓여 있다. 인기 학군에 속한 ㄷ초등학교 ㅇ교사에 따르면, 아이들의 행동 양식은 부모의 소득 수준에 따른 사회적 정서와 상당히 일치한다. “입으로는 아껴 쓴다고 말하지만 실천은 묘한 방향으로 나타난다. 아이들은 절약을 ‘내 것에 대한 애착’ 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빌려준 학용품을 되돌려받는 것, 혹은 빌려주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근검 · 절약이 학습되지 못한 데다가, 부모에게서 타인에 대해 배타적인 차가운 삶을 먼저 배운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려운 때일수록 함께 사는 자세가 중요해요”

반대로 생계가 어려운 계층의 자녀들은 각박한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산동네의 경우 전화가 끊긴 집이 있을 정도다. 부부 싸움이 잦으면 아이의 표정에 바로 드러난다. 지난해 말부터 아이들의 행동이 삭막하고 거칠어 졌다. 싸움도 잦다”라고 ㅂ초등학교 ㅇ교사는 말했다.

그렇다고 IMF 상황이 부정적인 영향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설 학원에 빼앗겼던 아이들의 시간이 학교 안으로 되돌아오게 된 점이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방과 후면 예외 없이 학교를 떠나 피아노 · 미술 · 컴퓨터 학원 등으로 몰려갔었다. 학원은 아이들을 작은 또래 집단으로 쪼개는 역기능을 한다. 용봉초등학교 이경선 교사는 “공동 작업으로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내주었을 때 아이들이 학원 단위로 갈라지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했었다. 최근에는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두루 어울리는 것 같다”라고 밝혔다.

이제는 방과 후 교정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학교라는 큰 울타리와 학원을 매개로 한 작은 또래 모임이 적절하게 어울리면서 어린이들에게 바람직한 성장 환경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기껏 IMF 한파의 초기 단계일 뿐이다. 상황은 머지 않아 걷잡을 수 없이 급박하게 변해갈 것으로 보인다. 사태의 진전에 따라 어린이의 세계 또한 유사한 빠르기로 변해 갈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변화의 방향은 어느 쪽일까. 여기 희망을 담은 한 가지 사례가 있다.

최준일(64) 문수현(4년) 등 서울 청덕초등학교 어린이 10여 명은 “IMF 한파가 더욱 심해지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에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불우 이웃 ·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더 심해질 거에요. 하지만 자기 힘만 믿는 사회, 힘 센 사람 중심의 사회보다는 다 함께 살려는 자세가 중요해요.” 어린이는 어른의 ‘양심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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