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 노동 시장, 제2차 실업 대란 임박
  • 김은남·고재열 기자 ()
  • 승인 2001.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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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술 산업만 '반짝', '기타 인력' 몸값 추락일로…'퇴출 0순위' 비정규직도 계속 증가

사진설명 : '엇갈리는 희비' : 기업·금융 구조조정의 여파에 경기 침체가 겹치면서 올 상반기에 제2차 실업대란이 도래할 전망이다. 그래도 정보 기술(IT)업종 고급 인재만은 억대 몸값으로 대우받는다.

"당신은 자신의 이력서를한 달에한 번씩 업데이트하고 있습니까?"

헤드헌터로부터 이런 질문을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대답이 '예'냐 '아니오'냐에 따라 당신의 운명은갈린다. 한쪽은고급 지식 근로자, 이른바 '골드 칼라'로가는 길이요, 다른 한쪽은 '있어도그만, 없어도 그만'인주변 인력으로 가는 길이다. <경영 혁명>의 저자 톰 피터스에 따르면 '작년의이력서와 올해의 이력서가 같은 사람은 실패한 직장인'이다.

과연 그럴까. 새해들어 실업자수가 다시 100만 명을 넘어서리라는 전망이나오고 노동 시장 양극화 조짐이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올해는 정보 기술(IT) 관련산업의 경기만 양호할 뿐 나머지 전통 산업의 경기는 매우 침체할 것이라고 삼성경제연구원은 내다보고 있다.


하이테크 업종·외국계 기업은 때 아닌 구인난

정보 기술 산업에 종사하는 인력은전체 산업 종사자의 10% 미만이다. 이에 따라나머지 90%가 종사하는 전통 업종을 중심으로 실업대란이 우려되는 와중에도정보 기술업종에서 일하는 일부 핵심인력의 몸값은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지난해 억대 연봉을 주도하던 증권가 펀드매니저나 닷컴사원이 찬밥신세가 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국내 컴퓨터 보안업체 기술이사로 있던 ㅇ씨는 최근 '연봉1억원+이적금 α'를 받고다른 벤처 기업 최고경영자(CEO)로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대기업인 ㅅ사에서 초고속 승진해 화제를 모았던 30대 부장급공학박사는 '연봉 1억5천만원+초과 이익의 10%에해당하는 성과급'을 받는 조건으로 외국계 컨설팅 업체로 이적하기로 했다. 이처럼 이익 배분제에 따라 성과급을 할당하면 이들의 연봉은 단순한 억대를 넘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이르기도 한다는 것이 헤드헌터 이준영씨(케이원컨설팅)의 설명이다.

PNE컨설팅 대표 홍성녀씨는 경기가 하강 국면이라지만 정보 기술·하이테크업종과 외국계 기업의 인력수요는 꾸준히늘고 있으며, 이들 업체의 경우 '사람은많으나 쓸 만한 인재가 없어' 구인에 오히려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드림서치 대표 이병숙씨 또한 '위기에 처한 벤처기업일수록 유능한최고경영자 영입을 마지막 돌파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들 전문가의 몸값이 오르면 올랐지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주변 인력의 몸값은 시간이갈수록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지난 1월4일 서울 마포구 고용안정센터에서 만난장 아무개씨(59)는 외환위기 이후 정규직→비정규직→실업자로 전락하는 경로를 밟았다. 5년전까지만 해도 장씨는 정부가 운영하는 사회 복지시설의 중간 관리직이었다.

당시 그의 수입은 월 2백만원 선. 외환 위기가 닥치면서 정리 해고된 그는 영업용 택시 기사를 거쳐 3년전 아파트경비원으로 들어갔다. 수입은 절반(월 100만원선)으로 줄었지만 채용 형태는 정규직이었다. 그러나1년 전 그는 회사측의 일방적인 통보에 따라 계약직으로 밀려났다. 급여는 더 깎여 70만원.그렇게 1년을 버텼더니 이번에는 해고 통보가 날아 왔다.

전통적인 사무직 노동자도마음 편할날이 없다. "몸값 좋았을 때 장가나가지"라는 노모의 타박 앞에서할 말이 없다는한 은행원의 말마따나 금융·기업 구조 조정은 또다른 시련을 예고하고 있다. 노동부는11·3 부실 기업 퇴출 조처로발생한 실업자가5만3천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있다. 여기에다 금융·공공 부문 구조 조정으로 추가 발생할 예상 실업자만도 2만2천명이다.

대기업 직원의 몸값도폭락한 지 오래이다. 국내 최고 명문대학에서 경영학석·박사를 마친 뒤 손꼽히는대기업에서 10년을근무한 김 아무개씨(36)는 최근 이직을 생각하고 인력 채용 업체를 찾았다가 일생 일대의수모를 당했다. '대기업에서 5년 넘게 일한사람은 창의력이 떨어져 채용을 원하는 업체가별로 없다'는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대기업 임원 출신이라 할지라도이력서가 A4용지 2장을 넘지 않는다면 이직은 아예 포기하는편이 낫다고 헤드헌터 이준영씨는 말한다.


취약해진 고용 시장, 대량 실업 가능성 상존

정보 기술 업체 종사자라고 다 잘 나가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도 소수의 핵심 인력과 나머지 주변 인력이 있다.도메인 관리 전문 업체인 (주)후이즈는 올 초공채를 실시했다가 깜짝 놀랐다. 경력 1∼2년웹마스터 3명을 뽑는 데 무려 5백여 명이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연봉 수준이이전 직장보다떨어져도 좋으니 이 회사에서 일하게 해달라는 지원자도 여럿 있었다.

'닷컴 기업이 몰락하면서 정보 기술 분야 종사자 사이에도안정희구성이 뚜렷해졌다'는 것이 인크루트 홍보담당 이민희씨의분석이다. 높은 연봉보다는 안정된 직장, 거액의 스톡옵션보다는 소액이라도 이적금형태의 현금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최근에는지배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헤드헌터나 기업체인사 담당자들의 조언대로영어를능수능란하게 구사하고, 자기 몸값을 높이려고 끊임없이 경력을 관리하면 보통 직장인도 언젠가는 골드칼라 대열에 낄 수 있을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노동자의 노력 부족과 의지박약만을 탓하기에는외환 위기 이후 급변하는 노동 시장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심각하다. 실업자 100만명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고는 하지만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사태 직후와지금은 상황이 크게 다르다는 것이LG경제연구원 이우성 박사의 지적이다.


구조 조정 최대 피해자, 비정규직

파견근로제나 정리해고제가 보장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기업이 자유롭게 인력을 감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고용조정제가 도입되면서 고용 시장이 유연해진 지금은 신속하게 인력을 재조정할 길이 열려 있다.다시 말해 경기가 악화할 때마다 대량 실업이 발생할가능성이 상존하는 셈이다.

그러나 해고의 빗장이 활짝 열린 데 반해 실업에 따른 충격을 흡수할 사회안전망은 미흡하다. 오직 급증한 비정규직 노동자가'안전판' 구실을 했을 뿐이다. 인원 감축이 있을 때마다 계약직·임시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는 '해고 0순위'였다. 노동계는 외환 위기 이후 노동 시장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로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비율이 역전된 것을꼽는다. 정규직 대 비정규직 비율은 IMF직전인 1996년 56.6%대 43.4%에서 2000년 6월 현재52.4% 대 47%로 역전했다. 경기가 좋아진뒤에도 기업들이 정규직 고용을 회피해 이제는 불안정고용 계층이 정규직을 앞지르게 된 것이다.

실제로 최근의 구조 조정 과정에서가장 먼저 피해를 본 것이 이들 비정규직이었다. 한국통신은 지난 11월 구조 조정 과정에서 전화 가설, 고장 수리 따위를맡은 계약직 사원 1만2천명 중에서 7천명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이들은 정규직 노조에도움을 요청했지만돌아온 것은 무관심뿐이었다.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정규직 노조 대열에 합류하려 해도 노조집행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규직만사람인가? 계약직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우리는같은 배를 탄 직원이다." 계약직 사원들은 절규했지만 12월 말 회사는 이들을 모두 해고했다.

비정규직은 계약직에 비해 임금이 낮을 뿐더러 복지 수준도 열악하다. 민주노총 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 노동자의임금은 정규직 노동자의 80.5% 수준이다. 이들가운데 시간외 수당과 상여금을 받는 노동자는 20% 남짓하다. 4대 보험 가입률도 70%를 밑돈다. 이런대접을 받다 보면 스스로를 '2류 인생'이라고 비하하게 된다는 것이 한 계약직 노동자의 말이다. 사무직에 종사하는 또 다른 노동자는정규직 사람들과 밥을 같이 먹는 것조차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이들 중에는 정규직과 동일한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불리한 처우를받는 사람이상당수이다. "과거에는 직무에 따른 비정규직이 많았다. 그런데 IMF 이후에는 똑같은 일을 시키면서도 이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문제이다"라고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지적했다.

한 예로대우조선·삼성조선·현대중공업의 경우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맡는다. 그런데도이들은 신분이 불안하고 임금도 더 낮다.개중에는 건설 현장 인부처럼 임금을 시급으로지급하는 즉시급고용 형태도 등장했다. 이렇게 고용이 불안해지면서 혼기를 놓친 청년 노동자 수천명이 조선소가 있는 거제도·울산·목포 일대를 유목민처럼 떠도는 바람에 '제2의 농촌 총각' 같은 사회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는 것이 노동운동가 홍기보씨의 말이다.


구조적 실업 시대…경기 좋아져도 문제 해결 어려워

더 큰 문제는 경기가 좋아진다고해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라는 점이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박사는 현재의 실업이 구조적·마찰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일시적인 경기 악화로 인해 증가한 '경기적 실업'이라면 해결방법은 간단하다. 경기가 풀리면 된다.

그렇지만 산업 구조를재편하면서 발생하는 '구조적 실업'이나, 직장이나 직종을 변경하려는데 새로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기가쉽지 않아 발생하는 '마찰적 실업'은 한번에해결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새 기술을 습득하거나 조직간 수평 이동이 거의불가능한 40∼50대 노동자와 사무직 중간 관리층의실업 문제가 앞으로 더 심각해지고 장기화할 전망이라고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조백현 연구원은 말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각종 실업 대책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실효성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1년 장기 실업자도 갈수록 늘어

실제로 외환 위기이후 노동시장에는 1년 이상 장기 실업이 크게 늘어나는새로운 특성이 나타났다. 이들 장기 실업자는 경기가 잠깐 반짝했던 1999년∼2000년 상반기에도줄지 않았다. 한때 직업을 가진 경험이 있는 실업자의 비중 또한 외환 위기이전 50%대에서 1998년 이후 90%대로 높아졌다. 이는 한번 실직한노동자가 재취업하기가 그만큼어려워졌음을 나타낸다.

한쪽에서는 억대 연봉을 흥정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경쟁에 진입할기회조차 봉쇄당하는 현실. 이같은 노동 시장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정부는 실업자에게효과적인재취업 기회를, 기업은 조직 구성원에게 개개인의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교육 기회를 확대해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우성 박사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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