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에' 부르는 新투쟁가
  • 고제규·고재열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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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학번 6인의 '10년' 회고/
"혁명·좌절 동시 체감…운동은 지금도 진행형"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젊다고 부르는 것을 그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해져 간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 그는 기억의 그물을 던진다. 자신을 향해 그물을 덮어씌워 자신을 끌어올린다. 어부인 동시에 어획물이 되어 그는 과거의 자신이 무엇이었나를, 자신이 무엇이 되어 있었나를 보기 위해, 시간의 문턱, 장소의 문턱에다 그물을 던지는 것이다.
-잉게보르크 바하만 〈삼십세〉 중에서


대학에 입학한 지 올해로 10년째인 91학번은 대부분 1972년 생, 우리 나이로 서른이다. 1991년 대학에 입학한 이들은 분신 정국을 거치며 질풍노도와 같은 1학년을 보냈다. 군대에 다녀와 복학한 뒤 급속히 변한 대학 사회에서 문화적 혼란기를 겪었던 이들은 선배 386세대와 신세대 후배 사이에 낀 주변인이었다. 졸업할 때는 IMF 경제 위기로 극심한 취업난에 시달렸다.


시대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사회적 사춘기를 거친 91학번들이 서른 살이 되어 다시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언론 개혁을 놓고 서로 펜 끝을 겨누고 있는 〈한겨레〉와 〈중앙일보〉의 기자, 사법고시에 합격해 입신에 성공한 사법연수원생과 시민단체 상근 활동가, 평범한 회사원과 91학번의 고민을 모아 다큐멘터리를 찍는 감독 등 여섯 사람의 1991년 회고담과 요즘 생각을 옮겨 싣는다.


〈한겨레〉 안수찬 기자

고려대 사회학과 91학번




1991년 4월26일 저녁 단과대 정치토론회 중에 사회를 보던 선배에게 쪽지가 한 장 전달되었다. 선배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명지대 1학년에 다니던 강경대씨의 죽음을 접하는 순간이었다. 곧바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갔다. 사수대로 자원해 강경대의 시신을 지켰다.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5월이었다. 아침에 등교하면 죽음을 알리는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그러면 울면서 학생회실로 들어갔다. 오전에는 교내에서 선전전을 했고 오후에는 교내 집회를 갖고 정문과 시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저녁이면 뒤풀이를 겸한 정치 토론을 벌였다. 밤이 늦어서야 집에 들어가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5월9일 민자당 해체 시위를 거쳐 5월24일 성균관대생 김귀정씨가 죽을 때까지 강의실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시작해서 백병원에서 끝난 그 해 5월을 거치면서 나는 진심으로 혁명을 예감했었다. 하지만 김지하씨의 〈조선일보〉 기고문과 김기설씨 유서 대필 사건, 정원식 총리 구타 사건을 거치면서 거리를 메웠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1991년 8월 교지편집부에 들어갔다. 소련연방 해체와 서태지 등장 등을 지켜보면서 학생운동이 급격하게 쇠락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대안을 찾으려고 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교지에 '학생운동이라는 공룡'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적당히 좌절하기도 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전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기사를 쓰고 있다. 아직 나의 실천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앙일보〉 배노필 기자

서울대 언어학과 91학번




91학번은 386 선배의 뒤를 쫓아간 마지막 학번이다. 시대에 떠밀려 1990년대 학생운동의 대장을 맡은 우리는 '공격하라, 공격하라'고 외치며 팔로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뒤를 돌아보고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리는 당황했다. 우리 뒤에는 팔짱을 낀 구경꾼이 있을 뿐이었다.


1991년의 상황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후폭풍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이미 학생운동은 사분오열되고 있었다. 학생운동이 쇠퇴할 징후가 보이자 그 반작용으로 더욱 거세게 마지막 불꽃이 타올랐던 것 같다.


학회와 세미나에 참석하며 1991년 1학기를 보내고 2학기부터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문학회 활동과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1991년 5월의 강렬한 경험이 없는 후배들과는 단절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마무리를 잘 하자'는 생각에서 후배 교육에 열중했다. 하지만 후배들의 관심은 급속도로 다른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영어로 학습하거나 영화나 문화에 관한 주제로 세미나를 하는 등 후배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한편으로는 전망이 보이지 않던 상황에서 내 짐을 후배들에게 옮겨 놓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4학년 1학기에 학생운동을 그만두었다. '계속할 것이면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라'는 선배들의 요구를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다. '체제에 부역하지는 말자'는 정도의 각오를 다지고 나왔다. 이후 대학원에서 언론정보학을 전공하고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하게 되었다.


요즘은 언론 개혁에 대해서도 생각을 정리해보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한겨레〉의 91학번 기자를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고 싶다. 각자가 어느 줄에 섰느냐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결정했던 10년 전 대학 1학년 때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함께 문제 의식을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이제는 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다.


사법연수원생 박진웅씨

고려대 법학과 91학번




평범한 대학 신입생이었지만 강경대씨의 죽음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리로 나섰다. 그의 죽음은 대자보를 통해서 처음 접했다. 당연히 수업은 빠졌다. 수업에 들어가면 오히려 강사가 "뭐 하러 수업에 들어오느냐. 오늘은 휴강이니 민주광장에 나가 보라"고 나무라기도 했다.


시위에 참여하면서도 내가 운동권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사회에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대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여름방학이 지나면서 학생운동은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혁명의 분위기까지 맛보았던 우리가 왜 갑자기 그렇게 쉽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쉽게 무너졌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 답을 얻기 위해 운동권 서클인 한국사회연구회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대학 생활을 학생운동에 전념했다. 1992년에 카투사로 입대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속칭 '미제의 용병'이 되기 싫어서 가지 않고 학생운동을 계속했다.


복학 후에 진로를 고민하던 중 사법고시를 보기로 결정했다. 감옥에 가 있는 친구를 돕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법에 무지해 허둥댔던 경험 때문이었다. 1996년부터 3년 동안 공부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1991년의 경험은 지금의 내가 있게 한 원동력이다. 연수원 2년차인데 지금 노동법학회 총무를 맡고 있고 민주노총에서 법률 상담도 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 흔한 말로 민중을 위해 살고 싶다. 운동은 여전히 내 삶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참여연대 안진걸 간사

중앙대 법학과 91학번




1991년은 모두가 정치 권력의 부도덕성에 분노했던 한 해였다. 같은 과 동기 1백10명 중 90명 정도가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그런 경험을 했던 것은 아마 우리가 마지막 세대였을 것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후에도 학생회 활동을 계속했다. 새로운 모습의 학생운동을 하고 싶었다. 학생회 간부에게 나오는 장학금을 모아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주는 IMF 장학금제도를 만들고, 헌혈 운동·종이컵 안 쓰기 운동 등 다양한 운동을 시도해 보았다. 후배들에게 학생 자치 활동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것을 다 해보느라 학교를 참 오래 다녔다. 남들보다 3학기를 더 다녀서 11학기에야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학교에 다니던 중에 건설 노동자들이 만든 우리건설이라는 회사에서 몇 개월 일한 적이 있었다. '백년 동안 무너지지 않을 집을 이 땅의 집 없는 서민이 없어질 때까지 짓겠다'는 것이 우리건설의 신념이었다. 졸업하면 그 회사에서 일하려고 했는데 IMF로 그만 부도가 나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졸업 무렵 참여연대 간사 모집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이자제한법 부활·서민금융 안정대책 등 주로 서민들의 생활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요즘은 핸드폰 요금 인하 운동을 펼치고 있다.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다른 91학번 활동가들이 많은데 모임을 만들어 종종 만나고 있다.


과학동아 출판팀 박일삼씨

동아대 사학과 91학번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전교조 선생님을 접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평소 친했던 선생님이 어느 날 가슴에 '참교육 실현'이라는 리본을 달고 나타났다. 평소에 전교조의 '전'자도 꺼내지 않던 선생님이었다. 얼마 후 선생님은 학교를 떠났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의 충격이 나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 주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아는 만큼 분노하고 분노한 만큼 실천한다'는 과내 현대사연구회에 가입했다. 학회에 가입한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강경대씨의 죽음을 접했다. 부산 서면 로터리에서 부산대까지 시내를 관통하는 8시간 거리의 거리 시위에 '일수를 찍듯' 매일 참가했다.


〈조선일보〉에 실린 김지하씨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읽고 많이 혼란스러웠다. 이후 여러 가지 사건을 거치면서 친구들이 하나둘씩 떨어져나갔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열심히 운동에 참여했다.


1972년생이라고 말하는 것과 91학번이라고 말하는 것은 느낌이 매우 다르다. 91학번이라는 말에는 떨림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91학번을 '낀 세대'라고 동정하는데 나는 오히려 91학번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던 91학번은 오히려 혜택 받은 세대일 것이다.


'다큐이야기' 대표 김환태씨

명지대 국문과 91학번




학교 다닐 때 강경대씨를 알지는 못했다. 그가 죽었던 시위에 나도 참가했다. 막 자리를 빠져나오다가 멀리서 그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동안 그에게 부채 의식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올해 사망 10년째가 되는 해를 맞이해 뭔가를 해주고 싶어서 단편 영화 한 편과 장편 영화 한 편을 기획했다. 〈내 친구 경대〉라는 제목의 단편에는 알려지지 않은 강경대의 모습을 담았다. 그의 부모님과 친구·선배 들을 두루 만나 열사가 아니라 '친구 강경대'의 모습을 복원했다.


〈1991년 1학년〉이라는 장편은 1991년에 대학 1학년을 보낸 91학번 10명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10명을 인터뷰하고 그들이 조금씩 잊혀 가는 기억 속에서도 강경대씨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모두들 삶에 대한 건강한 고민을 붙들고 있었다.


인터뷰했던 91학번 중에 학생운동에 대해서 '착하게 살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맞는 말인 것 같다. 91학번은 마지막으로 민중의 힘을 보았던 세대이다. 평생을 살아가면서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그 해에 느꼈던 것 같다.


강경대 추모제에서 91학번 91명 '합창'


강경대씨가 죽은 지 10년이 되는 4월26일 추모제에서 91학번 91명은 운동권 가요인 〈나이 서른에 우린〉을 합창한다.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고민을 포기하지 않은 '나이 서른의 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친구 경대를 기억할 것이다.


우리들의 노래와 우리들의 숨결이

나이 서른엔 어떤 뜻을 지닐까.

저 거친 들녘에 피어난 나리꽃의 향기를

나이 서른에 우린 기억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만남과 우리들의 약속이

나이 서른엔 어떤 뜻을 지닐까.

빈 가슴마다 울려나던 참된 그리움의 북소리를

나이 서른에 우린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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