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거국 내각 합의했었다
  • 정희상 기자 (hschung@e-sisa.co.kr)
  • 승인 2001.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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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대연정' 협상 극적 타결…
DJ, '강한 정부' 선택해 없던 일로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해 말 노벨상을 받은 후 역사에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겠다고 다짐했다. 남은 2년여 임기에 노벨 평화상 정신을 살려 여야 정쟁을 중단하고 '민주 인권 국가'에 걸맞는 화합형 통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벨상을 받은 지 불과 6개월여 만에 그는 성공한 대통령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국면을 맞아 악전 고투하고 있다.




최근 발생한 안동수 법무부장관 낙마 파동은 성공한 대통령을 꿈꾸는 김대통령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민심은 더 이상 6개월 전 노벨상을 받은 현직 대통령의 통치 행태에 온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노벨상 수상이 DJ 정권에 오만과 독선을 불러 국가 경영 전반에 심각한 후유증을 불러왔다는 인식이 많다.


현재 DJ 정권이 겪고 있는 위기는 '강한 정부, 강한 여당'을 주창해온 청와대와 집권 여당의 힘의 논리에서 말미암은 측면이 크다. 올 들어 정부·여당이 주요 국정 사안에 온갖 밀어붙이기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민심으로부터 꼼수 또는 무리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한 정부' 기치 아래서 일어난 자민련에 의원 꿔주기, 국민건강보험 파동, 언론 개혁 밀어붙이기, 부평 대우차 노동자 강경 진압, 그리고 안동수 법무부장관 인선 파동 등 일련의 사건들이 그랬다. 현정권의 구호에도 불구하고 DJ 정권을 정말 강한 정부라고 인식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이런 방식으로 계속 나가다가는 김대통령이 임기를 제대로 마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다급해진 청와대와 여권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당정 쇄신과 전열 재정비를 모색하고 있지만 뾰족한 돌파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바로 '강한 정부'라는 잘못 끼운 첫 단추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원기 최고위원이 DJ 밀명 받고 협상 이끌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직후 김대통령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고심하다 강한 정부론을 선택했다. 결코 과거 완료형이라 볼 수 없는 숨가빴던 정치 비화는 지난해 가을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김대통령의 임기말 구상은 여세를 몰아 '당대에 성공한 대통령 되기'였다. 이를 실현해줄 복안은 여야 대타협을 통한 대연정 또는 거국 내각이었다. DJ의 밀명을 받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측과 접촉에 나선 사람은 김원기 최고위원(당시 당고문). 그는 협상이 타결될 경우 타협 정국을 이끄는 화합형 당 대표가 될 자격으로 뛰었다. 이렇게 해서 김원기-하순봉-김진재 3인 사이에 대타협을 위한 숨가쁜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 결과는 순조로웠고 각료 배분 문제까지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당초 국무총리 자리를 요구했던 한나라당은 협상 과정에서 요구 조건을 실세 장관 2∼3석 할애로 수정했다. 당시 배경에 대해 이회창 총재의 한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대통령제에서 총리는 대독 총리일 수밖에 없는 데다 누적된 실정에 대한 책임을 한나라당이 질 수는 없다고 판단해서 사회 부처 주요 장관 자리를 요구했다." 그에 따르면 여당측은 경제 부처 장관 직을 배분하려고 했지만 악화하는 경제 현실을 감안해 법무부와 행정자치부 장관을 요구했고 우여곡절 끝에 전격 타결되었다는 것이다. 지방 선거와 대선을 앞두고 검찰·경찰·법원의 정치 중립화를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한 전략적 요구였던 셈이다.




김대통령과 이회창 총재 사이에 무르익었던 대연정 협상 내용은 당시 연정 체제 장관 직을 제의받았던 한 인사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여야 합의에 의한 법무부장관 후보는 현정권 들어 검찰 항명 파동을 일으켰던 심재륜 전 대구고검장이었다. 심씨는 이에 대해 "지난해 말 김원기 최고위원 쪽에서 사람을 보내와 연정 구상을 밝히면서 법무부장관 직을 제의하기에 적극 검토한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야 대타협에 의한 연정 구상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당시까지만 해도 김대통령은 마음 속에 민주인권국가라는 국제적 이미지에 걸맞는 임기말을 생각하고 여야 영수회담을 통해 대타협 정치를 합의하려 했지만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협조하지 않아 물 건너갔다"라고 말했다. 사사건건 김대통령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드러낸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결렬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당시 실무 협상에 개입한 한나라당측 인사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대연정이 합의에 이르자 위기 의식을 느낀 민주당 김중권 대표(당시 최고위원)가 김대통령에게 이총재의 마음을 왜곡 전달함으로써 '실패한 대통령 만들기'라는 음해가 나왔다는 것이다. 대신 김중권 부총재가 '강한 정부·강한 여당론'을 펴며 김대통령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다고 설득해 결국 김중권 대표 체제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불신은, 여야 간에 합의된 연정 구상에 쐐기를 박기 위해 여권이 영수 회담 이전에 협상을 깨기 위한 사전정지 작업을 벌였다고 보는 데서 비롯되었다. 자민련에 의원 꿔주기, 안기부 돈 사건 폭로에 이어 열린 영수회담에서 어떻게 대타협이 나올 수 있었겠느냐는 항변이다. 이처럼 여야는 당시 깊숙한 논의를 거쳐 대타협 연정에 합의하고서도 서로 등돌린 채 배신자 타령을 늘어놓다가 결국 김중권 대표체제의 '강한 정부, 강한 여당론'이 주도하는 정국을 맞이했던 것이다.


"DJ가 마음 비워야 난국 돌파 가능"


이같은 정치 비화에 대해 민주당 김원기 최고위원은 그 과정이 공개되는 것이 곤혹스럽다며 말을 아꼈다. 그러나 그는 "누적된 사회적·정치적 갈등이 정치의 장에서 소화되어야만 국민의 불만이 정권 핵심에만 몰리는 기현상이 없어질 수 있다. 야당을 포용하는 큰 정치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것이 소신이다"라고 말했다. 남은 1년 반 임기 안에 김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자신은 당 대표에 연연하지 않고 여야를 오가며 교량 역할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강한 여당을 기치로 내건 김중권 대표 체제를 선택한 김대통령은 지난 6개월간 결과적으로 정국 운영에 실패하고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해 말 여야 사이에 무르익었던 대타협 정국이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기다려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야는 그동안 여러 차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고 더구나 내년 지방 선거와 대선을 앞두고 사사건건 대립 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여권의 잇단 실정으로 가만히 앉아서도 대세론이라는 떡을 챙기고 있는 이회창 총재 처지에서도 몇 달 전 물 건너간 연정에 관심을 기울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정치는 없고 전투만 남은 정치판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민심은 강한 정부론을 기치로 김대통령이 주도해온 각종 '전투'에 등을 돌렸다. 집권 세력이 맞이한 이 총체적 위기 국면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김대통령밖에는 없다. 당대는 물론 역사적으로 성공한 대통령이 되겠다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돌아선 민심을 잡는 길뿐이다. 그런 점에서 위기를 맞고서도 여론에 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김대통령의 인식은 국민의 정부라기보다는 '국민에게 강한 정부'로만 비치기에 충분하다. 민심은 김대통령이 일부러 강해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솔직하게 국가를 경영하는 모습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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