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2차 남북 정상회담 중재 나선다
  • 남문희 기자 (bulgot@e-sisa.co.kr)
  • 승인 2001.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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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북정책관 윌리엄 페리, 지미 카터 역할 맡을 듯…
페리 8∼9월 방북→'큰 틀' 합의→답방 선언→연말 회담 가능성


부시 행정부가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는 대북 협상 전략의 '큰 그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6월6일 북한의 핵· 미사일· 재래식 전력을 주요 의제로 해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북한과 협상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궁금증을 자아냈다(25쪽 관련 기사 참조).




이와 관련해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앞으로 부시 정부의 대북 협상에서 드러난 부분보다는 드러나지 않은 부분의 역할을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드러난 부분이란 부시 팀과 북한 당국 간의 공식 접촉 창구를 말한다. 이미 잭 프리처드 한반도 담당 특사와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간에 실무 접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공식 창구 간의 협상에서는 쟁점이 극명해져 양측이 갈등을 빚을 소지가 매우 높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오히려 실질적인 협상은 드러나지 않은 비공식 창구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부시 행정부가 이 비공식 창구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내정한 인물이 바로 윌리엄 페리 전 대북정책 조정관이다. 페리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 한반도 문제의 해법인 '페리 프로세스'를 도출해낸 인물이다. 공화당 부시 정권이 민주당 정권에서 활동한 그에게 이같은 대임을 맡긴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다. 지난 5월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한·미·일 3국 고위급 민간 회담이야말로 그의 컴백 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이 회의는 여러 모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주최측인 페리 쪽에서는 이 회담을 민간 회의라고 설명했지만 임동원 통일부장관과 가토 료조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 내정자 등 한국과 일본의 현직 고위 책임자가 클린턴 정권의 인물이 주최한 회의에 참가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페리가 현 공화당 행정부에서도 어떤 역할을 담당하게 되지 않았다면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워싱턴 소식통들은 이미 이 회의 이전에 부시 행정부가 페리에게 어떤 대임을 맡겼고, 이 회의는 바로 페리측이 역할을 개시했다는 신호탄이었다고 지적한다.




부시 정부가 페리에게 맡긴 대임이란 바로 앞으로 있을 북·미 협상에서 '큰 틀의 해결사'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라고 한다.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과거 클린턴 정권 시절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수행했던 역할을 페리가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클린턴 정권 초기인 1994년 6월 한반도는 북한의 영변 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선제 공격이 검토되면서 전쟁 위기에 휩싸였다. 이때 카터 전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함으로써 전쟁 위기를 해소하는 동시에 극적으로 남북 정상회담의 주춧돌을 놓은 바 있다.


부시, 미국 통제 벗어난 남북관계 원치 않아


부시 행정부는 제2차 남북 정상회담 중재를 페리에게 맡기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제2차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미국의 기본 입장과 직결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점이다. 부시 행정부는 지난해 1차 남북 정상회담이 미국을 배제한 채 남북 당사자 간에 이루어진 것에 대해 문제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칫하면 남북 관계가 미국의 통제 범위를 벗어날 위험성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2차 정상회담이 미국의 중재에 따라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통제력 회복을 시도하는 것이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부시 정부가 남북 관계를 방해하고 있다는 그동안의 인상을 불식하고 오히려 남북 정상회담 재개에 중재하고 협조했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같은 복안을 실현하는 데 남북한 모두에게 거부감이 없는 페리가 적임자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2차 정상회담의 향배와 페리의 방북 활동이 같이 맞물려 돌아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이미 페리측은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에 방북 의사를 타진했고, 북한측 역시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방북 시기에 대해 유엔대표부측은 '금년 중 이루어질 것'이라고 포괄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소식통들은 8월이나 9월이 유력하다고 본다.


따라서 초미의 관심사인 2차 남북 정상회담 추진과 관련해서는 앞으로 두 가지 서로 다른 움직임이 상호 중첩되거나 경쟁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단 한국 정부는 1차 때와 마찬가지로 2차 회담 역시 남북 당사자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당연히' 가지고 있다. 최근 민주당 장성민 의원이 "북·미 대화 재개 및 남북간 물밑 접촉 등을 통해 볼 때, 김정일 위원장이 8·15 또는 늦어도 9월 중에 답방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발언한 것이나, 지난 6월11일자 한 조간 신문이 비슷한 내용으로 보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남·북·미 현안 해결 안돼 8·15 답방 어려워




그러나 8·15 답방설에 대해서는 남북간 현안이나 북·미간 현안의 가닥이 아직 잡히지 않은 상태여서 너무 성급한 추측이라는 지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북·미 관계 소식통들은 김위원장의 답방 시기에 대해 대체로 연말설을 주장해 왔다. 머지 않아 북·미 대화가 시작된다 해도 당분간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8∼9월께 페리가 방북하는 것을 계기로 북·미 간에 '큰 틀'의 합의를 이루고, 이와 동시에 김위원장이 서울 답방을 선언하는 형식을 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부시 대통령이 10월 상하이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정상회담(에이펙)에 참석할 때 서울을 방문해 김대통령과 의견을 조율한 뒤 연말께 2차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현재 북·미 간에는 페리의 남북 정상회담 중재 외에도 이면에서 빅딜을 해야만 하는 중대 현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지난 6월6일 부시 대통령이 대북 대화 3대 의제의 하나로 언급한 북의 재래식 무기 문제이다.


페리, 북한과 재래식 무기 감축 논의할 듯


그동안 부시 행정부는 주로 클린턴 정부의 대북 협상 성과 가운데 미진한 점만을 집중 거론해 왔기 때문에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런 미진한 점뿐 아니라 클린턴 행정부가 빠뜨리고 넘어간 부분까지 해결함으로써 대북 협상을 완성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숨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있다. 부시 행정부가 대북 협상의 1순위로 북한의 재래식 무기 문제를 들고 나온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또한 부시 행정부는 이 문제와 관련해 북한측에 일방적으로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주한미군 지상군 철수 문제와 상호주의적으로 해결하자고 암시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페리가 부시 행정부의 기본 구상인 북한의 재래식 무기와 주한미군 지상군 문제에 대해,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기 훨씬 전인 지난해 9월 국내에서 열린 비공개 세미나에서 구상을 밝힌 적이 있다는 점이다. 국내의 한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국내 연구기관과 미국측 기관이 합동으로 주최한 이 세미나에서, 남북 정상회담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뒤 "이제부터 진정한 '암스 컨트롤'(군비 통제)이 필요하다. 만약 한반도에 진정한 긴장 완화 또는 평화 구축을 위한 움직임이 나타난다면, 전방에 배치한 주한미군 2사단을 괌이나 다른 지역으로 배치하고 한반도는 미국 지상군이 아닌 해·공군이 담당하는 방법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라고 폭탄 발언을 했다.


그 시점은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주한미군 주둔 문제에 대해 어떤 합의를 보았다고 거듭 강조되던 때였기 때문에 그의 이같은 발언은 참석자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보니 그의 당시 발언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 안보 전략가들이 활발하게 거론해온 주한미군 지상군 철수론의 예고탄이었고, 부시 행정부의 군 구조 개편안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방북한다면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간 최대 현안인 재래식 군축 문제를 일괄 타결하려고 시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페리 개인적으로는 클린턴 행정부 때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에 초점을 두었던 첫 번째 `'페리 프로세스'를 확장해 북한의 재래식 전력 문제까지 포함하는 두 번째 '페리 프로세스'를 완성한다는 의미가 있기도 하다.


만약 북·미가 이같은 일괄 타결 구도에 합의할 경우 그 다음 남는 문제는 이 구도에서 어떻게 모양 좋게 한국의 참여를 보장할 것인가 하는 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최근 미국측이 남북한과 미국 3자 협상을 통해 북한 재래식 전력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했고, 북한측 역시 3자 회담 방식에 긍정적인 것도 이 점과 관련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측은 특히 유럽의 재래식 군축 협상(CSCE)을 모델로 하여 이 협상의 한반도판이라 할 한반도 재래식 군축(CFK) 협상의 틀을 만들자는 데까지 얘기를 구체화할 가능성도 있다. 김정일 위원장 역시 남북 당사자주의 또는 남북 문제 자주적 해결이라는 자신의 명분을 유지하고, 대미 협상의 실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해법 마련에 골몰해 오고 있는 터다. 따라서 앞으로 2차 남북 정상회담은 북·미 양측 그리고 여기에 남한까지 포함된 복잡한 함수 관계에 의해 그 시기와 방식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 소식통들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가 페리 카드를 검토하기 시작한 시점은 지난 3월8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 직후였다고 한다. 당시 부시 대통령의 대북 강경 발언 파문이 예상 외로 커지면서 기존 대북 협상 전략을 수정하는 일이 불가피해졌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부시 정부의 현 외교안보팀 중에는 부시의 강경 발언에 따라 태도가 돌변한 북한측을 달래가면서 빅딜을 끌어낼 적임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대북 강경파로 낙인 찍힌 부시 외교팀이 섣불리 이를 맡으려고 할 경우 이미 부시 정부의 노선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남북한이나, 민주당 우위로 의회 역학 구도가 바뀐 미국 국내 사정 등을 고려할 때 오히려 더 큰 부담을 떠안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당시 부시 외교팀에서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페리 카드 부활에 적극적이었고, 실무적으로는 찰스 카트먼 전 한반도 담당 특사가 이를 강력히 건의했다고 한다. 또한 상층부에서는 강경파로 알려진 딕 체니 부통령이 오히려 이를 적극 후원했다. 파월 국무장관을 중심으로 한 부시 외교안보팀의 이같은 제의를 페리가 흔쾌히 승낙하면서 부시 정부의 대북 협상 전략의 큰 틀이 비로소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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