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 "안 변하면 죽는다"
  • 김종민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1.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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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론' 확산…산별 노조 전환·정치 세력화 등 대안 찾기 고심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예전 같지 않다. 보수 언론의 비난 공세와 정부의 강경 대응 탓도 있지만, 지난 6월 민주노총이 벌인 연대 파업은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민주노총의 한 조합원은 현재의 상황을 이렇게 진단한다. "10년 전만 해도 언론과 정부가 아무리 몰아붙여도 다수 국민들의 암묵적인 지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운동을 집단 이기주의로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른바 '노동운동 위기론'이다. 노동계 인사들도 대부분 현재 노동운동이 위기, 적어도 전환기에 놓여 있다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노동운동계의 원로 김금수 민주노총 지도위원(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노동운동이 지금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세계화·치열한 경쟁·기업 구조 조정 등 주변 환경이 엄청나게 달라지면서, 이제 단위 기업 노조의 파업 투쟁을 통해 임금이나 근로 조건을 개선하는 식의 '고전적인 틀'로는 버티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노동계 현실' 드러낸 6월 연대 파업


민주노총 김태일 부위원장도 "공장에서 사회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노동운동의 가장 큰 문제다"라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기업에서 구조 조정이 진행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의 55%를 차지하고 실업자는 늘고 있으나, 사실상 단위 사업장에 갇혀 있는 노동운동으로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6월의 민주노총 연대 파업은 노동계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모성보호법안 제정·주5일 근무·사립학교법 개정 등 제도 개선을 투쟁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나 사실 파업의 핵심 현안은 항공사와 병원 등 주요 파업 사업장의 내부 문제였다. 그 문제가 해결되자 투쟁의 동력은 크게 떨어졌다.


7월 초 다시 연대 파업에 돌입한다고 했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다. 연대 투쟁의 주축이 되리라고 기대했던 기아자동차 노조는 사측과 협상을 마무리지었고, 현대자동차 노조는 7월12일부터 사측과 협상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어 민주노총 지도부를 고민에 빠뜨리고 있다.


위기를 극복할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노동계가 가장 절실하게 여기는 것은 산별 노조로 전환하는 것이다. 사무금융노련 김형탁 위원장은 "단위 기업·정규직·대공장 중심의 노동운동 관행을 탈피하는 것이 관건이다. 현재의 기업별 노조 체제에서 산별 체제로 조직 형태를 전환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라고 주장했다. 산별 노조를 만들어 조직력·예산·정책 역량을 집중하지 않고는 현재의 복잡한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 기업별 노조의 평균 조합원 수는 2백40명. 세계적으로 우리 나라와 일본을 제외하고는 기업별 노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거의 없다. 김금수 지도위원은 기업별 노조 형태가 유지되는 한 임금 문제를 넘어서 제도 개선이나 정책 변화를 요구하는 활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노동계의 인식이라고 말했다.


현재 병원노조·언론노조·금속노조 등 산별 노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산별 체제로 조직 전환이 더욱 빠르게 이루어질 전망이다. 문제는 사용자측이 산별 노조를 협상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산별 체제로 바뀌면 의식화한 소수 집단이 조직력과 예산을 장악하고 단위 기업의 노사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 사용자측의 우려다.


그러나 김태일 부위원장은 산별 노조로 가는 것이 노사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조직이 커지면 사회적 책임이 무거워져서 파업을 남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노사 협상의 전문성도 높아져 감정 싸움이나 무리한 주장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조직 내부의 경직성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치 세력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제도와 정책의 변화가 절실한 상황에서 노동자를 대변하는 제도권 정당이 없는 한 과격한 장외 투쟁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16대 총선에서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을 통해 정치세력화를 시도했으나 1석도 얻지 못하고 실패했다.


민주노총 관계자들은 당시 정당명부제를 관철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정당명부제가 도입되면 민주노동당의 현재 지지율만으로도 10석은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김태일 부위원장은 "정당명부제 관철은 19세기 영국에서 노동자 보통선거권 획득을 위해 벌인 차티스트 운동에 비견될 수 있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도 내부 개혁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비타협적 투쟁을 외치지 않으면 개량주의라고 비난받는 내부의 경직성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민주노총의 한 간부는 "노사정위원회 복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지만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어려운 분위기다"라고 털어놓았다. 김대중 정권 퇴진 주장에 대해서도 현실성과 대안이 없는 목표라고 보는 이가 많지만 내놓고 얘기를 못 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한 조합원은 이기는 장수에게 병사가 모이는 법이라면서 "중요한 것은 투쟁이냐 타협이냐가 아니라 조합원들의 문제와 고충을 조금씩이라도 해결하는 것이다"라고 지도부에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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