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빠진 나랏돈' 누가 주물렀나
  • 소종섭 기자 (kumkang@e-sisa.co.kr)
  • 승인 2001.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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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보는 허수아비, 재경부 · 금감위에 '칼자루'…
"투입 과정에 정치적 입김 의혹"
12월1일, 김대중 대통령은 "(공적자금 부실 운영과 관련해) 정부에도 책임이 있으며 잘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책임을 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이미 이한동 국무총리·진 념 재경부장관을 해임하고 국정 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공적자금 책임론'이 급류를 타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1백50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을 주물렀던 것일까.




재정경제부가 지난 9월1일 발간한 〈공적자금 백서〉 3쪽에는 공적자금 지원과 관련한 의사 결정 체계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 '공적자금의 조성과 전반적인 관리는 재경부가 담당하나 금융감독위원회 등과 상호 협의하에 결정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투입 결정과 집행은 금융감독위원회, 자산관리공사(경영관리위원회), 예금보험공사(운영위원회)에서 법령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2월 공적자금 관리·운용 전반에 총괄적인 심의·조정 기능을 가진 공적자금관리위원회(위원장 박 승)가 출범하기 전까지 공적자금 지원과 관련한 형식상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예금보험공사(예보) 운영위원회였다. 자산관리공사 경영위원회도 있으나, 이 기구는 금융기관의 부실 채권을 매입·처리하는 단순 업무만을 맡고 있다. 반면 예보 운영위는 출자나 예금대지급 등 자금 지원 여부를 의결하고 부실 금융기관을 판정하는 결정권을 갖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14명(정부 대표 5명, 금융기관 대표 7명, 민간 대표 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가 지금은 9명(정부 대표 5명, 민간 대표 4명)으로 줄었다.


위원장은 이상용 예보 사장이 맡고 있고, 정부 대표로는 재경부 차관·기획예산처 차관·금감위 부위원장·한국은행 부총재가 당연직으로 참여하고 있다. 민간 대표들은 재경부장관이 위촉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예보 운영위는 형식적 창구이고 실제로는 재경부와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가 공적자금을 주물렀다. 지난해 5월 국회 재경위에 출석한 예금보험공사 이상용 사장의 말이다. "부실 금융기관으로 볼 것인가 등은 금감위가 결정하고, 예보 운영위는 결정이 된 뒤에 집행 측면에서 자금이 어느 정도 투입된다고 할 때 열린다." 그는 한나라당 나오연 의원이 "공적자금 배정을 누가 주도했다고 보느냐"고 묻자 현재 시스템을 본다면 금감위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민주당 강운태 의원의 말은 좀 더 직설적이다. "금감위가 공적자금 규모를 결정하고 집행·대상 기관·시기까지 결정해서 예보에 통보했고, 예보는 집행만 하는 일종의 출납 창구로 전락했다." 지금껏 금감위 요청 사항을 예보 운영위가 변경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고, 일부 공무원은 부하 직원을 대리 출석시킨 경우도 있어 운영위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재경부와 예보의 관계는 어떠한가. 예보에 대한 재경부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인사권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예보의 이사와 감사는 재경부장관이 임명하고 사장은 재경부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재경부 차관은 예보의 당연직 운영위원이기도 하다.


이렇게 퍼즐을 맞추면 공적자금과 관련한 얼개가 그려진다. 공적자금 조성은 재경부가, 투입은 금감위가, 실무 집행은 예보가 맡는 그런 구조였다.


공적자금 움직인 사람, 대략 30명


공적자금관리위원회가 출범했어도 이런 구조가 크게 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적자금 관리위원 8명 가운데 재경부장관·기획예산처장관·금감원장이 정부측 위원으로 있고 이 가운데 재경부장관은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무엇보다 대통령 직속 기구이면서도 재경부 산하에 있다는 점은 이 기구가 여전히 재경부 등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런 이유로 일부에서는 이 기구를 국회 직속으로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구조를 바탕으로 따져보면 공적자금을 움직인 사람들은 대략 30명으로 압축된다. 우선 이규성·이헌재·이용근·강봉균·이근영·진 념 등 현정부 들어 재경부장관이나 금감위원장을 지냈거나 맡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상용 예보 사장과 유시열 은행연합회장, 박진우 신협회장 등 전·현직 예보 운영위원과 정재룡 자산관리공사 사장 등 20여 명, 박 승 위원장 등 공적자금관리위원 8명 등이다. 일부에서는 청와대 경제수석의 동반 책임론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다.


한나라당에서는 공적자금이 부실하게 운용된 뒤켠에 정치적인 커넥션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올 2월 한나라당이 낸 '공적자금 백서'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일·상업·조흥은행은 1997년 말 예금 규모와 부실 정도 등이 비슷했는데 한일·상업 은행에는 공적자금이 3. 2조원 투입되었고 조흥은행에는 5.5조원이 투입되었다. 조흥은행 행장이 정권 실세였기 때문이라는 의혹이 있다".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은 6조원 이상을 들여 대우 CP를 고가에 사들인 점을 거론하며 정부가 자산관리공사에 고가 매입을 강요한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고, 산업은행이 현대그룹 회사채를 인수한 것을 들어 '특혜' 의혹도 제기한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문제 제기는 아직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설'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경실련 금융개혁위원장을 맡고 있는 경희대 권영준 교수는 "신용협동조합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등 공적자금 배분에 정치적인 고려가 있었던 흔적이 있다. 철저히 조사해 관료들의 배임이나 직무유기 문제가 있다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현정권은 정책 실패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국민의 혈세가 들어간 공적자금 문제에서만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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