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기다리면 낭패 본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2.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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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섭씨 사례/주한미군, 보상 약속 해놓고 나 몰라라



미군기지로부터 여러 가지 피해를 보고 있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미군측의 사과 수위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윤금이씨 살해 사건 때에는 부대 관계자의 단순한 유감 표명으로 그쳤지만, 한강 독극물 사건 때는 공보실장이 공식 사과를 했고, 이번 여중생 역사 사건에는 주한미군 사령관이 직접 사과 성명을 발표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시민·사회 단체가 대책위원회를 꾸려 불같이 일어서고, 사건이 언론에 대서 특필되고, 여론이 들불처럼 들끓은 이후에나 나타나는 모습이다. 시민·사회 단체가 나서지 않고,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 않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미군에게 사고를 당한 후에 가만히 미군의 처분만 기다리면 어떤 대접을 받게 되는지를 황호섭씨(40)의 사례를 보면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사고 직후 보상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미군측의 말만 믿고 기다렸던 황씨 가정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다.



지난해 11월19일 아침, 황씨는 친구 장우연씨(38)를 옆에 태우고 출근하다가 미군 전차 행렬과 마주쳤다. 앞서가던 트럭과 승용차가 정지했고, 그도 앞차를 따라 정지했다. 미군 전차가 황씨 옆을 줄지어 지나갔는데 그 중 한 대는 다른 전차에 견인되고 있었다.
그런데 전차 사이의 연결 고리가 갑자기 풀리면서 견인되던 전차가 그의 차를 깔고 지나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황씨는 피하지 못한 채 전차에 깔리고 말았다. 구급대가 와서 차 지붕을 떼어 내고 황씨와 장씨를 구출했지만 중태였다. 20일이 넘도록 의식을 찾지 못했던 두 사람은 여러 차례 뇌수술을 거쳐 겨우 소생했다.



이 사고는 100% 미군측 과실로 발생했다. 사고 당시 미군측은 잘못을 시인했고 피해자에게 최선을 다해 보상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과연 그 약속은 얼마나 지켜졌을까?
황씨는 현재 경기도 연천군의 전곡 백병원에서 8개월째 입원 중이다. 사고 당시의 충격과 뇌 손상으로 황씨는 현재 정신 장애(정신지체 1급)를 앓고 있다. 매일 한 주먹씩 약을 먹고 있지만 이미 현대 의학으로는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위로금 60만원 주고 감감 무소식



부인 문해순씨(36)는 남편의 똥오줌을 받아내고 온갖 시중을 들며 악몽 같은 8개월을 보냈다. 다른 가족은 이산가족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큰아들 기택이(8)는 큰집에 맡겼고 작은아들 현식이(3)는 이모댁과 고모댁을 전전하다가 겨우 엄마 품에 돌아왔다.
문씨는 요즘 잠을 자지 못한다. 돈을 내지 못해 아이들 교육보험이 해지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자동차보험에 들어 있어서 병원비는 해결되었지만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다. 남편이 치료를 받는 동안 여기저기서 급히 돈을 변통하느라 주변에 빚이 널려 있다. 사고 직후 위로금이랍시고 준 60만원말고 미군측은 아직 어떤 보상도 하지 않았다. 중환자실로 찾아와 보상용지라며 주고 간 쪽지말고는 보상에 대해 미군측으로부터 아직까지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다.



보상보다 문씨를 더 화나게 만드는 것은 미군의 태도이다. 문씨는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어느 부대 소속의 누가 어떤 상황에서 사고를 일으켰는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것이다. 요즘도 도로를 쌩쌩 달리는 미군 전차와 장갑차들을 보면 문씨는 ‘또 누구 가슴에 못을 박으려고 저러나’하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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