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뜨겁지만 일시적이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2.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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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사례/미군 철수·기지 반환 요구 않고 실리 모색


미군에 의한 끔찍한 범죄 혹은 사고가 발생하면 그 처리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처럼 진행된다. 사건을 알게 된 시민·사회 단체가 궐기하고, 언론이 이 사건을 대서 특필하면 반미 여론이 형성되는데, 미군측의 유감 표명과 보상이 이루어지면 절정에 다다른다. 이후 시민·사회 단체는 더 높은 사람의 사과를 요구하거나 미군 철수·기지 반환 등을 주장하지만, 여기서부터는 하강 국면이다. 언론 보도도 줄어들고 여론도 잠잠해진다. 한국 정부나 미군측은 별다른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어물쩡 넘어간다.



윤금이씨 살해 사건·충무로역 난동 사건·매향리 폭격장 문제·한강 독극물 방출 사건·미군기지 기름 누출 사고 등 최근 10년 동안 미군 관련 사건·사고가 날 때마다 국민은 분개했지만 개선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깃발과 구호가 사라지면 결국 피해자의 고통만이 남았다.



깃발과 구호 사라지면 슬그머니 잊혀



왜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미군 관련 사건·사고 해결 과정을 이웃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일본이 미국과 맺은 관계와 한국이 미국과 맺은 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주일미군 문제와 주한미군 문제를 그대로 비교하는 것에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그 대응 방식에는 배울 점이 있다.



일본에는 오키나와(해병대)·사세보(해군)·이와쿠미(해병대)·아즈기(해군)·요코스카(해군)·요코다(공군)·자마(육군)·미사와(공군)에 미군기지가 있다. 특히 오키나와의 주일미군 문제와 그 처리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오키나와 현에는 현재 주일미군의 75%가 주둔하고 있으며, 현 전체 면적의 11%를 미군기지가 차지하고 있다.



1995년 오키나와에서는 미군 해병대 사병이 초등학교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초등학생의 부모가 피해 사실을 경찰서에 알리자 일본 언론은 이 사건을 대서 특필했고, 일본 본토에서 시민·사회 단체 관계자들이 오키나와 섬을 찾았다. 처벌과 사죄를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자 부대 사령관은 일본 예법에 따라 사죄했고,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유감을 표했으며, 가해 사병들은 일본 형법에 따라 처벌받았다.



사건 발생에서 사죄와 처벌까지의 과정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오키나와 주민의 각성이었다. 오키나와는 1972년까지 미군정 아래 있었던 곳으로 미군사령관이 재판권까지 행사했던 곳이다. 오키나와는 임금이 본토의 70% 수준밖에 안 되고 실업률은 두 배에 달하는 등 상대적으로 낙후한 곳이다.



그런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는 경제의 원동력이었다. 중앙 정부가 기지가 있는 지역에 교부금을 주고 기반 시설을 설치해 주었기 때문이다. 본토에서 차별을 받아 취업이 잘 되지 않았던 오키나와 젊은이들은 기지에서 일하기를 희망했다. 한국에서 주한미군 주둔의 정당성이 안보 문제로 귀결된다면 오키나와에서는 돈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1995년 초등생 성폭행 사건 이전까지 오키나와에는 ‘기지는 곧 돈이다’라는 의식이 만연해 있었다. 미군 범죄가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자본의 논리에 막혔다. 미군 범죄에 대한 주민들의 비판 의식은 점점 무뎌졌다. 사건이 발생하고 피해 학생의 부모가 문제를 제기하자 오키나와 주민들이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기들의 후손에게 미군 범죄가 대물림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분노는 그 다음이었다.



일·미 행정협정 개정 성과





사건 발생 후 오타 지사는 주민의 안전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점을 사과했고 오키나와 주민 8만5천명이 모여 평화 시위를 벌였다. 자민당을 비롯한 오키나와의 모든 정당이 정쟁을 멈추고 함께 대응하는 등 정·관·민이 완벽하게 한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재발 방지와 문제 해결을 위해 구조적인 해결을 도모했다는 점이다. 미군측과 오키나와 현정부는 ‘오키나와에 관한 특별행동위원회’(SACO)를 공동으로 구성했다. 일·미 행정협정도 세부 조항을 개정해 중범죄를 저지른 미군에 대해서는 신병을 검찰의 기소 시점이 아닌 사건 발생 직후 인수할 수 있도록 바꾸었다.
오키나와 시민·사회 단체의 운동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한국처럼 미군 문제를 미군 철수 운동이나 기지 반환 운동으로 수렴하지 않고 평화 운동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많은 호응을 얻어냈다. 운동 방식도 화형식 같은 극단적인 방법보다는 기지 껴안기와 같은 평화적이고 대중적인 방법을 선택해 일반인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대중 동원을 위해 평화적인 방법을 이용하면서 이들은 미국 정부에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을 가했다. 일본 정부는 평화헌법에 위배되는데도 불구하고 ‘오모이야리요산’이라는 계정으로 매년 6천억 엔(한화 약 6조원)의 주둔 비용을 미군에 지불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단체들은 이런 미국의 ‘약한 고리’를 이용해 미국이 실리를 위해서는 사죄하고 관련 대책을 세워야 하도록 만들었다.



일본 본토 시민·사회 단체의 운동 방식도 한국과는 차이가 있다. 일본 본토의 단체 중에서는 오키나와 출신이 많은 오사카에서 특히 뜨겁게 호응했는데, 이들은 기지 문제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한국처럼 ‘범국민대책위’나 ‘공동대책위’ 같은 거창한 단체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오키나와 타임스>나 <류큐 신보>와 같은 현지 신문을 구독하면서까지 오키나와 문제를 꾸준히 챙겼다.
이번 여중생 역사 사건의 바람직한 처리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오키나와의 미군 문제와 함께 1992년 발생한 윤금이씨 살해 사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런 잔인 무도한 살인범도 우리가 처벌할 수 없다니’라는 문제 의식은 대규모 집회와 화형식, 택시기사들의 미군 안태우기 운동 등 갖가지 형태의 반미운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시민·사회 단체 운동가들은 윤씨 사건으로 일기 시작한 반미 감정을 ‘주한미군 철수’와 ‘미군기지 반환’ 구호로 수렴해 내려 했다.



‘미군기지반대운동을 통해 오키나와와 한국 민중의 연대를 도모하는 회’의 도유사 국제연대위원은 이런 윤금이씨 사건 해결 방법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며,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미군이 범죄나 사고를 일으키기 때문에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도씨는 “분노는 뜨겁지만 일시적이다. 차가운 이성을 가지고 주한미군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라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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