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케네디’ 대권 전략 떴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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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은 단순한 이미지 차용 차원을 넘어서 케네디의 용기와 케네디 가문의 영광까지 그대로 닮으려 하고 있다. 2002 대선에서 정몽준의 ‘케네디 전략’은 성공할 것인가.
의원회관 7층에 위치한 무소속 정몽준 의원의 방 한쪽 벽면에는 그의 활발한 대외 활동을 입증하는 듯한 사진 액자 9점이 놓여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슐츠 전 미국 국무장관, 틸러리 전 주한미군사령관 등이 그와 함께 사진을 찍은 주인공들이다. 정의원이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과 어울리고 있는 사진을 여러 장 모아 만든 액자도 있다.


이 액자들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액자가 3점 있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아들인, 이제는 고인이 된 케네디 주니어와 함께 찍은 사진이 2점, 케네디 주니어가 친필 사인을 해서 보낸 케네디 가족 사진이 1점이다. 정의원은 1년의 절반 가량을 외국에서 보내며, 각국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고 있다. 그런 그가 골라서 전시해 놓은 사진 9점 가운데 3분의 1이 케네디와 관련된 것이라는 데서 방 주인의 취향을 넘어선 어떤 의도가 느껴진다. 거론한 김에 하나 더 들자면, 액자들 옆의 서가에는 책이 2백권쯤 꽂혀 있다. ‘Profiles in Courage’라는 제목의 양서도 거기 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소개된 존 F. 케네디의 저서다. 퓰리처 상을 받은 이 책을 정의원은 밑줄을 치며 탐독했다.






“대선 출마하면 케네디 가문이 도울 것”
이쯤의 예비 정보를 갖고 나면, “부자들이 진보 정당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라는 그의 말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들을 수 있다. 7월4일 한 모임에 참석한 정의원은 정구현 연세대 경영대학원장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의 케네디 전 대통령과 록펠러 등은 모두 거부였지만 민주당원이었으며, 로마의 시저도 최고 명문 귀족이었으나 민중파를 대변하면서 원로원파와 맞서 싸웠다”라고 덧붙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선 출마 가능성을 처음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즉각 민주당 입당설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측근들은 원론적인 언급이었을 뿐이라고 잘랐다.



여권의 내부 사정이 오리무중인 상태에서 그가 성급히 진로를 결정할 것으로 보기는 사실 어렵다. 대신 그는 스스로를 케네디나 록펠러와 대비하는 효과는 충분히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평소 가까운 사람들에게 ‘politics is all about personality and ideals’라는 케네디 주니어의 말을, 영어 원문 그대로 자주 인용했다.


여기서 ‘퍼스낼리티’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단을 내려 돌파하곤 했던 케네디 대통령의 용기를 뜻하며, 정의원이 생각하는 정치의 첫째 덕목은 용기를 가지고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게 정의원 측근의 해설이다. 최근 정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이 무리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반박했다. “전례는 만들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의 측근은 그가 새로운 정치 실험을 준비하고 있으며, 케네디가 보여준 용기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의 위인 닮기는 낯선 일이 아니다.


지난 봄 민주당 국민 경선 과정에 나섰던 노무현·김중권 두 후보는 서로 링컨 미국 대통령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 ‘변호사 출신’ ‘지역 화합의 전도사’라는 몇 가지 코드에서 링컨과 두 사람이 닮았던 셈이다. 역시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던 정동영 의원도 케네디 대통령의 젊고 유연한 리더십을 자신의 이미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런 이미지 차용은 정치인들이 자신을 더 빠르고 쉽게 알리기 위한 일종의 마케팅 기법이기도 하다. 5년 전 이인제 후보가 박정희 전 대통령 닮기를 시도했던 것이나, 이한동 전 총리가 왕건론을 내세웠던 것도 같은 사례다.



그런데 정몽준 의원의 케네디 닮기는 이런 사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는 한번도 자신이 케네디 이미지를 차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적이 없다. 대신 그는 케네디 집안과 직접 교류하는 방법으로 단순한 이미지 차용을 뛰어넘었다. 3년 전인 1999년 2월 그는 케네디 주니어를 한국에 초청했다. 국내에는 소개되지도 않은 저서의 출판기념회를 열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당시 케네디 주니어와 울산까지 동행해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를 보여주었다. 케네디 주니어는 답례로 그 해 7월 그를 뉴욕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 케네디스쿨 이사진을 대동한 채 그에게 밥을 샀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기 불과 2주 전의 일이었다.



케네디 주니어가 사망함으로써 정의원과 그의 우정은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이벤트는 두 집안이 서로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정의원의 한 지인은 정의원이 대선에 출마할 경우 에드워드 케네디나 그의 조카들이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년 전 일은 의식적인 기획 작품 성격이 강했지만 단순한 1회성 행사는 아니었다. 정의원의 케네디 닮기는 정씨 집안의 오랜 꿈이기도 하다. 두 집안은 비슷한 점이 하나둘이 아니다. 선대가 돈을 벌어 주류 사회에 안착한 뒤, 엘리트 교육을 받은 2세들이 당대의 리더로 나섰다는 점이 우선 그렇다. 케네디 집안의 가정 교육이 식탁 대화로부터 시작되었듯이, ‘왕회장’의 가족 조찬 모임도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인생은 한 세대와 다음 세대의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은 케네디 가문의 오랜 가훈이다. 정주영에서 정몽준으로 이어지는 부자의 대권 도전도 이런 경구를 실천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보수·진보 양쪽 인사들과 교류 폭 넓어






부잣집 아들 출신 엘리트인 존 F. 케네디는 2년10개월이라는 짧은 집권 기간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뉴 프런티어’로 불린 그의 정책은 미국인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는 흑백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안을 만들었고, 평화봉사단을 창설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소련을 굴복시키는 강력한 대외정책으로 미국인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다.



정의원도 지금까지의 이력으로만 보면 케네디에 못지 않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컬럼비아 대학과 MIT에서 수학했으며, 존스 홉킨스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땄다. 1982년 31세에 현대중공업 사장에 취임했고, 37세 때인 1988년 13대 국회에 최연소 의원으로 진출했다. 국제 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그는 월드컵 공동 개최에 성공했고 현재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을 맡고 있다.



비록 정치권에 ‘자기 사람’을 거느리지는 못했지만, 그만큼 교류 폭이 넓은 정치인도 드물다. 아산재단 상임이사인 한승주 고려대 총장 서리와 후원회장인 이홍구 전 총리는 그와 절친하다. 그는 보수 지도층 인사들의 모임이자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도 가입해 있는 서울국제포럼 회원이기도 하다. 강신옥·이해구 전 의원이 그와 자주 어울리는 멤버이며, 민주당 의원 중에서는 장영달·조성준 의원이 그와 가깝다. 그의 인맥은 아산재단과 축구협회에 주로 포진되어 있다. 김상진 축구협회 부회장, 임 삼 홍보위원장, 정종문 자문위원 등 축구협회 간부들과 정치학 박사인 이달희 보좌관 등이 거의 매일 그의 곁을 지키는 측근들이다.



그의 인맥은 진보 인사들 쪽으로도 상당히 두텁다. 월드컵 후 한국을 떠나는 히딩크 감독은 공항에서 재야 인사 백기완씨와 만나 포옹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만남의 배후에 정의원이 있었다. 두 사람은 정의원이 어렸을 때부터 왕래하던 사이다. 정의원 방에는 시인 김지하씨가 쓴 시 <타는 목마름으로> 친필 원고가 걸려 있다. 지난해 김씨가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가질 때 정의원은 진보 지식인인 유홍준 교수와 함께 가서 그 원고를 샀다. 최 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이나 분신 노동자 전태일의 매제인 임삼진씨도 그와 자주 어울린다. 총선 때 시민단체가 그를 낙선 후보로 정했을 때 그는 시민연대 사무실을 찾아가 잘 배웠다고 인사하기도 했다. 부자이면서 진보적 이미지를 꿈꾸는 것도 그의 이런 여유에서 나온 것이다.



정몽준 의원에게 최대의 딜레마는 아버지다. 넘어선 듯하면서도 여지없이 그를 가로막는 것이 1992년의 정주영 이미지다. 당시 정주영 후보가 얻은 표는 3백88만67표(유효 득표의 16.3%). 정주영씨는 일찍 국민당을 창당하고 돈을 쏟아부었지만 실패했다. 정의원은 당시도 창당에 소극적이었다. 그가 현재 무소속을 선호하는 배경에는 10년 전의 실패 기억이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또 다른 인물은 1992년 미국 대선에 출마했던 텍사스 출신 억만장자 로스 페로다. 그와 페로는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부자이고, 무소속이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다. ‘깨끗한 정치 실험’을 준비 중이라는 정의원처럼 로스 페로도 선거운동 대부분을 자원 봉사자와 함께 모금된 정치 헌금만 가지고 치러냈다. 그가 출마 선언을 했을 때 지지율은 35%를 넘었다. 공화당 부시 후보(30%)나 민주당 클린턴 후보(16%)보다 훨씬 높았다. 기존 정치에 환멸을 느낀 유권자들이 그에게서 신선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후보 사퇴와 재출마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몰락했다. 페로는 19% 지지를 얻어냈지만, 선거인을 단 한 명도 확보하지 못했다.



“낙선해도 선거에서 얻은 표는 자산이 된다”






“여론조사 결과를 무시할 수 없다”라는 정몽준 의원도 결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다. 지난 3월부터 모집을 시작한 후원회원 수는 이제 1만5천명을 넘어섰다. 정의원은 현재 조직 확대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정기적으로 소식지를 받아보는 e메일 회원도 7천명이나 된다. 아직 초보 단계이기는 하지만 ‘MJ 러브’라는 자발적인 팬클럽도 등장했다. 그의 측근은 출마 선언만 하면 조직은 금방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8월15일 지인들과 함께 3박4일 일정으로 지리산 등정에 나설 계획이다. 일종의 대선 출정을 앞둔 의식이다.



그의 행보가 앞으로 전개될 현실 정치의 파란 속에서 어떻게 변모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여권의 ‘백지 신당론’에 관심을 표시한 상태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무소속 출마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그의 측근은 국민후보로 나서는 방식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그의 지인이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인제 학습 효과는 두 가지다. 경선 불복이 멍에가 된다는 것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낙선하더라도 선거에서 얻은 표는 결국 자산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낙선을 각오하고 자기 소신을 지키는 지도자가 있어야만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있다.’ 존 F. 케네디가 <용기 있는 사람들>에서 쓴 유명한 경구다. 정몽준 의원은 이미 낙선을 각오하고라도 출마할 ‘용기’는 확보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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