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족 비켜라 코보스족이 간다 ”청담동 문화 혁명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3.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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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경제적 여유와 세련된 예술 취향을 겸비한 보보스 문화가 상륙했다. 이름하여 ‘코보스족’. 이들은 명품족으로 대표되던 청담동 풍속도를 하나둘 바꾸어 놓고 있다.



'개와 명품족은 출입금지.’ 한국의 소비 문화 일번지 청담동에 때아닌 유령이 나타났다. 이 유령의 이름은 바로 코보스(Korea와 Bobos의 합성어). 서울 청담동을 천박한 소비 문화 중심지에서 문화 예술 중심지로 형질 전환시키기 위해 ‘나이 든 유령’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청담동이 인근 압구정동을 제치고 소비 문화 일번지로 떠오르게 된 것은 외환 위기를 통과하면서부터이다. 어느 시인이 ‘욕망의 통조림통’이라고까지 명명했던 압구정동은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평범한 유흥가로 전락했다. 이제 압구정동은 강북의 신촌이나 홍대앞, 혹은 인근의 강남역 일대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졌다.


반면 청담동은 더욱 고급스럽게 변했다. LA 베벌리힐스를 연상시키는 고급 빌라촌이 들어서고 고급 바와 퓨전 레스토랑이 생기는 등 모든 것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베벌리힐스처럼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지는 않지만, 로데오 거리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명품숍·성형외과·고급 미용실 들은 외부인에게 보이지 않는 벽이 되었다. 그 울타리 안에서는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생겨났다.


‘윗구정동’이라고도 불리는 청담동에 둥지를 튼 것은 1990년대 초중반 오렌지족으로 보이는 명품족이었다. 이들이 창궐하면서 청담동은 외국의 명품 재고품을 떼다 파는 멀티숍에서 ‘한번 명품은 영원한 명품’이라는 명품족의 헛된 신념을 파고든 중고 명품숍, 그리고 명품 밝히다 패가망신한 명품족들의 마지막 안전망인 명품 전당포까지, 온통 명품에 지배되는 소비 공간이 되었다.


이런 청담동에 2~3년 전 ‘부르주아의 높은 경제적 지위와 보헤미안의 문화적 취향을 동시에 가진 문화’라는 보보스 문화가 상륙했다. 처음 명품족에게 전해졌을 때 보보스 문화는 자연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패션 트렌드의 하나로 이해될 뿐이었다. 뉴욕이 ‘고향’인 보보스와 명품족의 간극이 너무나 멀었기 때문이다.





명품족 혐오하는 ‘늙은 양아치들’


청담동 명품족들은 부모의 부를 승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으로 상류 사회에 진출한 뉴욕의 보보스와는 구별되었다. 그들은 뉴욕의 보보스들이 젊은 시절 경험했던 히피 문화처럼 반문화적인 경험 또한 하지 못했다. 보보스 문화를 제대로 수용한 세대는 오히려 이들의 선배들이었다.


KDA 박기태 대표는 몇년 전 청담동에서 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건축가·미술가 등을 모아 ‘노미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늙은 양아치들의 모임’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모임의 멤버들은 대부분 쉰살 전후의 예술 분야 종사자들이다. 청담동의 명품 문화를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이들은 보보스적인 문화를 적극 흡수하고 ‘코보스’라는 한국형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고급스러움만을 지향하는 1980년대 여피 문화에 대항해 1990년대 뉴욕에서 보보스 문화가 탄생한 것에 반해, 젊은 세대의 취향에 문제의식을 느낀 기성 세대가 코보스 문화를 일으킨 것이 다르기는 하지만, 뜯어 보면 둘은 닮은 점이 많다. 특히 이들은 상당한 정도로 경제적 성취를 이루고도 문화적으로 세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보보스족이 여피족의 보여주기 위한 문화를 혐오했던 것처럼 코보스들도 명품족의 과시형 소비를 싫어한다.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이것이 청담동 스타일이다’라고 말하는 이들이다. 코보스는 이들을 ‘사람들의 허영을 이용하는 저급한 장사아치들’이라고 비난한다.
1985년 처음 청담동으로 회사를 옮긴 이후 계속 청담동 일대에서 생활하고 있는 박기태 대표의 삶은 코보스적인 취향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뉴욕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시작한 쇼핑의 노하우를 그는 30년 동안 축적했다. 거기에 세계 4대 문명의 발원지를 비롯해 50여 나라를 방문하며 자신의 취향을 발전시켰다. 명품족이 사치품을 살 때 비싼 제품을 사는 것에 반해 그는 필수품을 살 때 최고급 제품을 고집한다.


취향에 관한 한 프로 중의 프로인 그가 주장하는 것은 브랜드의 망령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청담동 1세대로서 오렌지족 창궐부터 명품족 득세까지 모든 것을 목격한 그는 무작정 고급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코보스의 또 한 가지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예술가에 대한 경외심이다. 명품족이 연예인을 숭배하고 친교를 맺기 위해 파티를 여는 동안 이들은 예술가와 교류하고 전시회에 참석한다.





명품족과 함께 청담동의 맹주는 연예인들이다. 어떤 연예인이 그 가게에 오고 어떤 연예인이 그 물건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유행의 중심이 바뀌기 때문에 이곳 상인들은 연예인을 각별하게 대한다. PC방부터 분식집까지 연예인의 사인이 없는 곳이 없다. 모두가 연예인의 이름을 팔기 때문에 연예인이 자주 가는 집보다 연예인이 안 가는 집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다.
코보스들은 스타의 취향에 좌우되는 것이 청담동의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다링 미술재단 이미원 대표(37)는 청담동 문화를 부박하게 만든 주범으로 연예인을 지목한다. 그는 “연예인 선호증이 그들의 거지 근성만 부추겼다. 파티에서 수백만원짜리 시계를 연예인에게 선물하고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정말 한심한 짓이다”라고 말했다.


연예인 대신 예술가 ‘사랑’


연예인들의 수다가 아니라 예술가들의 논쟁이 청담동의 문화를 끌어올려 줄 것이라고 믿는 이씨는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청담동에 끌어들였다. 자신의 사무실을 오픈하면서 벌인 파티에서도 그는 연예인을 부르는 대신 젊은 미술가 25명을 불러 전시회를 개최할 기회를 주었다. 얼마 전 그는 외국 예술가들을 위해 수억원을 들여 빌라를 개조해 게스트하우스를 지었다. 외국 예술가들이 청담동을 자주 방문할 수 있도록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예술가를 대접하는 데는 박기태씨도 뒤지지 않는다. 회사 대표인 그가 사진가 강운구씨와 함께 여행할 때 강씨의 양말을 도맡아 빨아 주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쌈지의 천호균 대표도 예술가 사랑이 남다르다. 그는 행사에서 예술가들을 소개할 때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의 숫자는 진정한 아티스트의 숫자와 같다”라고 말한다.


홍대 인근에 갤러리 쌈지스페이스를 마련해 젊은 예술가들을 돕고 있는 천씨는 비즈니스의 중심에 예술가를 놓는다. 회사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제품보다 회사가 후원하는 아티스트를 더 전면에 내세운다. 회사 홍보팀도 제품 홍보가 아니라 소속 뮤지션 홍보에 주력한다. 매년 열리는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에는 직접 나서서 총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코보스족의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바로 사업 스타일이다. 청담동에 매장을 내는 것은 성공 확률이 낮다. 임차료도 비싸고 유행을 많이 타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보스족들은 단지 경제적인 성공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기업 이념을 ‘사랑’에 둔 이미원씨는 크리스찬 또뚜라는 플라워숍을 차리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지’를 실천했다. 그는 나이트클럽 웨이터와 댄서 출신 청소년 2명을 프랑스에 유학 보내 플라워아트 전문가로 키웠다.


홍보대행사 애비뉴 박인숙 대표(32)의 사업 방식도 코보스적인 사업의 묘미를 알려준다. 명품 전문 홍보 대행사로 입지를 굳혔지만 그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는 것과 다른 길을 걸었다. 그의 원칙은 의뢰인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일이 성격에 안 맞으면 차라리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이어야 최선의 결론이 나온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던 그녀에게는 아직 386세대의 열정이 남아 있다. 요즘도 에이즈 캠페인이나 아동천식 캠페인 등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수익성 여부에 관련 없이 도맡는다.
청담동은 어느 곳보다 공사가 잦은 곳이다. 수없이 많은 식당과 카페가 유행에 뒤떨어졌다는 이유로 폐쇄되고 새로운 건물이 최신 유행이라는 이유로 들어선다. 그러나 쉽게 변하지 않는 성향이 있다. 바로 끝없이 고급스러운 것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욕망을 쫓는 이 게임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이 게임의 대열에 코보스들도 함께 했다. 최근 천호균씨는 무조건 고급만 지향하는 명품족의 취향이 다양성의 미학을 깨닫도록 청담동에 ‘안테나숍’(해당 지역 소비자의 취향을 살피기 위해 설치한 매장)을 열었다. 이미원씨도 이곳에 건물을 신축했다. 이제 막 싹을 틔운 코보스 문화가 청담동의 가쁜 숨을 붙들 수 있을지 결과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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