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식 ‘캐주얼 행보’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3.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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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내각 인선 과정은 내용과 형식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권위와 관행을 깨나가는노대통령의 ‘준비된 파격’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이번 인사를 ‘파격’으로 보는 시각 자체가 타성에 젖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내각 인선 배경을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하지만 그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각은 여러 모로 파격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그 절정은 강금실·김두관·이창동 40대 트리오를 장관으로 발탁한 일이다(28∼32쪽 기사 참조). 이들은 연공과 서열, 주류 의식에 젖어 있는 관료 사회에 적지 않은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농고 출신을 농림부 수장에 올린 것이나, 육사가 아닌 갑종 간부 출신을, 의사·약사가 아닌 간호사 출신을 각각 국방부장관과 보건복지부장관에 임명한 것도 신선한 충격이다.





그러나 이번 조각은 내용 못지 않게 형식도 파격적이었다. 신임 각료들이 임명장을 받기 위해 청와대에 도착한 1시45분부터 노대통령이 기자회견을 끝낸 3시까지, 청와대 곳곳에서는 권위주의 파괴 장면이 속속 목격되었다.
오후 2시. 충무실에 도착한 노대통령은 신임 각료들이 임명장을 받기 위해 서 있는 것을 보고 “제가 직접 가서 하나하나 임명장을 주면 안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하지만 비서진의 권유로 임명장 수여는 예전 방식대로 진행되었다. 노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에도 당선자와 임명장을 받는 인수위원들 사이가 너무 멀어 사회자가 “인수위원들께서는 한두 발짝 더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라고 하자, “내가 가면 되지요”라며 스스로 자리를 옮겨 배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관료 출신들은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며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임명장 수여 후 대통령과 신임 각료들과의 개별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촬영 도중 노대통령이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나보다) 총리하고 같이 찍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제동을 걸었다. “우리는 ‘컨셉’이 다르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결국 개별 촬영이 다 끝난 후 노대통령이 “귀찮더라도 총리와 한 번 더 찍자. 그래야 장관의 소속이 분명해진다”라고 제안해, 대통령이 가운데 서고 총리가 대통령의 오른쪽, 장관이 대통령의 왼쪽에 서서 다시 촬영을 했다.


2시15분. 충무실에서 인왕실로 옮겨 간담회가 시작되었다. 고 건 총리가 짧게 인사말을 했고, 대통령도 “각료 직을 수락해줘서 고맙다. 잘해 보자”고 격려했다. 그런데 대통령의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사회자가 간담회 종료를 알리자 노대통령이 “간담회가 아니라 연설회구먼”이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래서 바로 자리를 끝내지 않고 간단하게 차 한잔을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평소 어느 일방의 훈시로만 끝나는 자리를 싫어했던 대통령의 스타일이 나타난 대목이다.


티타임이 끝난 후 노대통령은 신임 각료들과 버스를 나누어 타고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도중에 청와대에 관람 온 학생들을 만나자 버스에서 내려 사인을 해주고 “구경 잘 하고 가라”며 손도 흔들어 주었다. 과거에는 5월5일같이 특별한 날이 아니면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헬기장을 지날 무렵, 노대통령은 아예 버스에서 내려 각료들과 걸었다.


“국민과 쌍방향 대화 하겠다는 의지 담겨”


노무현 정부의 조각 발표장은 이미 생중계를 통해 국민들에게 공개된 그대로다. 고 건 총리가 신임 각료를 일일이 국민에게 소개했고, 대통령이 직접 인선 원칙과 배경을 설명했다. 비서실장이 내각 명단을 발표하고 대변인이 배경 설명 몇 마디 덧붙이던 기존 방식과는 180。 달랐다. 신임 각료에게 임명장을 먼저 주고 언론에 공개한 것도, 언론에 먼저 발표하고 서너 시간 후쯤 임명장을 주었던 관행에서 달라진 점이다.
눈 밝은 사람이라면 발견했겠지만, 대통령 의자에도 변화가 생겼다. 푹신한 안락 의자가 사라지고 배석자들이 앉는 것과 똑같은 사무용 의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잘 부탁합니다”라는 큰소리로 회견을 끝낸 노대통령은 불쑥 회견장 아래층에 있는 기자실을 찾았다. 마감 시간에 쫓겨 기사를 작성하던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그는 커다란 목소리로 “바쁜 분들은 인사 못 드리고 그냥 갑니데이”라며 기자실을 떠났다. 노대통령이 갑자기 동선을 바꾸는 통에 경호팀은 잔뜩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당선자 시절에도 그는 아무 예고 없이 대중 목욕탕과 백화점을 찾아 경호팀을 긴장하게 만들었고, 하루는 이동 중에 불쑥 “볼링 한 게임 하자”라고 제안해 경호원들과 볼링을 즐기기도 했다.


이런 대통령의 파격 행보에 여론은 대체로 ‘신선하다’는 반응이다. 고려대 함성득 교수는 “장관에게 모든 책임과 권한을 주고 대통령이 직접 장관과 국정을 논의하겠다는 책임장관제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최인욱 정책팀장은 “국민들에게 소상하게 인선 배경을 소개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국민과 쌍방향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라며 환영했다.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도 ‘젊은 대통령이라 역시 다르다’는 평가가 잇달았다. 한 청와대 참모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해, 노대통령 임기 중에 제2, 제3의 파격이 있을 것임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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