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2의 ‘대동아 공영권’ 구축하는가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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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손 잡고 세력 확대 ‘가속 페달’…중국 급성장에 맞서 미·일 안보 공조 강화
일본이 ‘흰머리 독수리’의 등에 확실하게 올라탔다.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이 세계 초강대국과 손잡고 21세기 ‘대동아 공영’, 나아가 세계 경영을 위한 또 한번의 비상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재건 사업에 군사력을 지원하고, 미국은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후원하는가 하면,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와 테러와의 전쟁 및 대량살상무기 색출에 공동 대처하는 등 최근 두 나라 사이에서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는 전략적 제휴는 괄목할 만하다.

양국의 전례 없는 공조는 현재 미국 뉴욕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 총회 현장에서 목격된다. 일본은 이번 유엔 총회에서 오랜 숙원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카드를 다시 한번 빼들었다. 세계는 유엔이 창설될 당시에 견주어 엄청나게 변했으며, 일본은 1956년 유엔에 가입한 이래 세계 평화와 안전, 무기 감축 등에서 어느 회원국보다 기여도가 크므로, 상임이사국 진출은 당연하다는 논리이다.

일본은 이미 지난 6월부터 가와구치 요리코 외무장관이 주재해, 유엔 대학 고문 요코타 요죠·요미우리 신분 논설위원 우에무라 다케시·일본재단 오구라 가즈오 등 명사들로 구성된 ‘유엔 개혁’ 그룹을 통해 보고서를 펴내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78쪽 상자 기사 참조).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노려

과거 같았으면 코웃음쳤을 미국이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다르다. 조지 부시 정부는 오래 전부터 ‘유엔 개혁’을 외쳐왔으며, 명시적인 지지 발언은 없었지만,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도 적극 지원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일본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국제 문제 해결에 발벗고 나설 용의가 있다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언제든지 환영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논의는 1990년대 중반에도 있었는데, 당시 미국은 일본의 국제 사회 기여를 ‘수표책 외교’라고 폄하하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같은 동맹 관계인 한·미 관계가 북한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와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를 둘러싼 논쟁 등으로 수렁에 빠져 있는 동안, 미국과 일본의 군사 협력은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앞에서 끌면 뒤에서 밀어주는 형국이다.

양국은 1997년 미·일 안보동맹의 기초가 되는 ‘미·일 방위협력지침’(방위지침)을 개정했다. 이 중 핵심 내용은 유사시 미국이 필요로 할 경우, 일본이 자위대 시설은 물론 민간 공항이나 항구를 제공하고, 일본 영토뿐 아니라 공해상이나 영공 이외의 공간에서 후방 지원 작전을 펼친다는 것이다. 방위지침에 따르면, 일본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전쟁이나 전투 행위를 벌일 경우 거의 자동으로 휘말려든다.

하지만 당시 방위지침을 통해 일본이 무조건 미국에 퍼주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본은 방위지침을 개정하면서, 영토 또는 영해 바깥에서도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할 근거를 마련했다. 일본은 또 ‘양국간 정보 및 첩보 공유’를 명문화함으로써, 군사 관련 첩보는 물론 국제 상황에 대해 미국측 정보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게 되었다.

방위지침 개정은 조지프 나이의 이른바 ‘나이 이니셔티브’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당시 미국 국방부 차관으로 있던 조지프 나이는 미군의 동아시아 주둔을 확고히 하기 위해 미·일 동맹 강화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리고, 이를 위해 양국간 각종 군사·안보 조약이나 규정 재검토·개정을 추진했다.

그로부터 다시 7년이 흐른 오늘날, 일본은 미국과 한층 더 강력한 동맹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일본 고이즈미 총리 자문 기구인 ‘안전 보장과 방위력에 관한 간담회’(간담회)가 9월 말 총리에게 보고서로 제출할 새 ‘방위 계획 대강’(방위대강)을 마련하면서 논점 정리 형식으로 내놓은 일본의 새 방위정책이 대표적이다.

1976년 내각에 의해 처음 채택되고 1995년 한 차례 개정된 방위대강에는 일본 방위 정책에 대한 기본 원칙과 함께 ‘기반적 방위력’이라는 개념이 명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기반적 방위력이란 ‘독립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방위 능력’ 정도로 풀이된다. 그런데 간담회의 논점 정리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했다.

기존 방위대강은 또 일본 주변에서 특별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일본이 유엔 활동을 지원하며 미·일 안보협정에 따라 대응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새 방위대강을 마련하고 있는 간담회측은, 이 가운데 유엔 관련 조항을 삭제하려고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뜻이 맞으면, 유엔의 승인 없이도 행동하겠다는 뜻이다.

간담회측이 발표한 논점은 한반도와 중국·타이완 관계에 대한 상황 판단을 기존의 ‘불안정 요인’이라는 비교적 온건한 표현에서 ‘비상하게 특수한 상황’으로 한 단계 격상했다. 중국을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 구체적으로 못박는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만약 이같은 논점이 연말에 공식 채택될 신 방위대강에 최종적으로 반영되면, 일본은 단순한 군사 협력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적어도 동아시아 안보 독트린에서도 미국의 이해와 완전히 합치하게 된다.북한 미사일 선제 공격 권리도 주장

미·일 군사동맹 강화에 따른 일본의 세력 확대는 일찍부터 예견되어 왔다. 미국은 부시 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2000년 11월, 이미 <아미티지 보고서>를 통해 미·일 군사동맹 강화를 위해 방위대강을 손질하고, 일본의 역내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을 증대할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현 부시 정부의 대일 정책에 나침반 구실을 하고 있는 이 보고서는, 일본을 ‘미국의 대 아시아 관여의 초석’이라고 규정하고, 미·일 동맹 관계를 영·미 동맹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의 대부분은 이미 실행되었거나 실행 과정에 있다.

일본이 지난해와 올해 이른바 ‘유사 법제’를 무더기로 통과시킨 것이나, 지난해 3월 독자 개발한 첩보 위성 2기를 쏘아올린 사실, 그리고 2001년 11월 일본과 중국의 경제 수역이 겹치는 지점에서 미국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아 북한의 간첩선을 격침한 사실 따위가 그것이다.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노력을 미국이 적극 지지해야 한다는 제안도 이 보고서의 외교 부문에 들어가 있다.

이 보고서 작성자 명단에는 리처드 아미티지·폴 월포위츠(현 미국 국방부 부장관)·제임스 켈리(현 미국 국무부 차관보 겸 북핵 담당 특사) 등 부시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한 공화당계 인사들 외에, 민주당계 전문가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입각이 유력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 행정대학원 원장이 대표적이다. 이미 2000년에 적어도 대일 정책에 관한 한, 미국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당파와 관계없이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일 간의 밀착과 미·일 안보 전략 동조화의 표면적인 구실은 새로운 안보 위협, 즉 대량살상무기 확산과 국제 테러에 대해 적절히 대응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시바 시게루 일본 방위청장이 지난해 1월 북한의 미사일 기지에 대한 선제 공격 권리를 주장해 대량살상무기 확산 저지를 위한 일본의 입장이 충격적으로 불거진 바 있다.

하지만 양국의 밀착을 촉발한 진정한 이유는 아시아 지역의 급속한 발전과 이와 동시에 진행되어온 중국의 급성장에 있다. 1997년 아시아개발은행이 펴낸 아시아 경제력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1820년대 세계 산업 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했던 아시아의 경제력은 1940년께 5분의 1로 줄었다. 그러던 것이 보고서 작성 시점에는 5분의 2 수준으로 늘었으며, 다시 2025년이 되면 그 이상으로 회복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런데 이같은 경제 성장의 중심에 잠재적인 세계 강대국으로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이 있었으니, 미국과 일본이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양국의 공조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특히 미국의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199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상황을 방치할 경우, 일본이 중국과 전략적으로 제휴할 것이라고 우려하게 되었다.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즈>의 편집인 제임스 호지의 주장은 이같은 미국 내 전문가 일반의 정세 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지난 7·8월호 <포린 어페어즈> 권두 논문에서 일본은 현재 중국·북한·타이완 문제 등으로 안보 불안을 느끼고 있는 상태라고 진단한 뒤 ‘미국의 안보 보장에 대해 확신을 잃어버릴 경우, 일본은 독자적으로 핵을 개발하거나 오히려 중국과 전략적인 동맹을 추구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중국과 한반도 문제를 처리하는 데 일본으로부터 의심을 사지 않도록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륙 세력’ 차단 위해 ‘해양 세력’ 단결?

미·일 두 나라의 공조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양국이 손잡고 러시아의 남하를 봉쇄하며 아시아 지역에 동반 진출했던 경험을 연상케 한다. 당시 미국의 최고 전략가였던 알프레드 마한은 시어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러시아라는 ‘대륙 세력’ 차단을 외교 정책의 제1 과제로 삼을 것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국·일본 등 ‘해양 세력’끼리 손을 잡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과거사를 돌이켜볼 때, 2000년 <아미티지 보고서>가 미·일 동맹 관계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전 및 안정은 물론 새 세기의 가능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선언한 대목은 의미 심장하다. 올해 미국과 일본은 수교 150주년을 맞아 워싱턴과 도쿄에서 번갈아 기념 행사를 이어가는 등 전에 없는 우의를 과시하고 있다. 미·일 관계가 동아시아 질서에 새로운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때 한국의 선택은 과연 무엇인가? 자칫 방심했다가는 100년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비극을 반복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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