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의 전설’ 향해 뛰고 또 뛰는 사람들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4.10.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엄청난 고통을 무릅쓴 채 그들은 왜 뛰고 또 뛰는가. 기적에 가까운 신기록 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아마추어 철인들을 만났다.
마라톤 ‘중독자’가 늘고 있다. 가위 폭발적이다. 10월24일 열리는 ‘2004 춘천마라톤 대회’에는 무려 2만4천2백2명이 42.195km 풀코스에 도전한다. 1996년 2백62명이 뛰었으니까 8년 만에 100배 가까이 늘어났다. 단풍이 드는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더 거침없이 내달린다. 마라톤 인구가 기하급수로 느는 이유는 단순하다. 마라톤이 주는 혜택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달린 사람들은 말한다. “스트레스가 완벽하게 해소된다.” “나 자신의 영적·정신적 자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오랫동안 달고 다니던 고질병을 몰아냈다.” “마라톤의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은 곧 인구의 1천분의 1에 해당하는 엘리트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다.” “판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결단력과 정신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고치며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기회다.”

그 효험을 체험하려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이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질주하고 있다. 그 행렬의 앞에 국가 대표들보다 더 오래, 더 힘차게 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 사람에게 마라톤의 매력과 영광을 전파하고 있는 ‘길 위의 전설’, 즉 아마추어 마라톤계의 ‘스타’들을 만나본다.
한국 최초로 마라톤 풀코스 100번 완주-박용각씨

호리호리한 체구, 수줍은 미소, 친근한 충청도 말씨…. 최근 한국 마라톤사(史)에 새롭게 이름을 올린 박용각씨(49·용문중기 대표)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여려 보인다. 그러나 사진 촬영을 위해 마라톤 복장을 갖추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는 우리에서 막 풀려난 야생마 같았다. 허벅지와 장딴지 근육은 그가 판매하는 중장비 부품만큼이나 단단했다. 그는 그 다리로 지난 9월5일 국내 최초로 마라톤 풀코스를 100번 완주했다.

어찌 보면 박씨의 신기록은 기적에 가깝다. 마흔세 살까지 달리기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첫 도전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1998년 3월 어느 날, 그는 신문을 보다가 경주에서 마라톤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100m 이상 달려본 적이 없는 그였지만, 단순히 자신의 한계를 알고 싶어 그 대회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형님이 중풍으로 쓰러져 ‘혹시, 나도?’라며 자신의 건강을 의심하고 있던 터였다.

출정 전 날, 친구가 장도를 축하한다며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친구와 소주 일곱 병을 나누어 마셨다. 그리고 눈을 잠깐 붙인 뒤 출발선 위에 섰다. 변변한 연습 한 번 못한 처지였다. 긴장한 탓에 다리가 약간 뻣뻣해졌지만 그는 완주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30km에 다다르자 한계에 부딪혔다. 발은 천근만근이었고 좌뇌는 계속해서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으니 그만두라’고 명령했다. 결국 길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한 노인이 그의 곁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노인의 등 뒤에 붙은 글귀가 큼지막하게 눈에 들어왔다. ‘74세. 7번째 풀코스 도전’.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노인을 뒤쫓았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결승선을 통과한 시간은 4시간 36분 28초. 썩 좋은 기록은 아니었지만 그는 대만족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로소 내 운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라고 그는 돌이켰다.

경기를 끝낸 뒤 보름 동안 걷지도 못했지만, 그는 온몸을 휘감는 희열 덕에 아픈 줄 몰랐다. 그 해 10월, 그 쾌감을 다시 체감하려고 춘천마라톤대회에 도전했다. 때때로 알 수 없는 외로움과 함께 신체적 고통이 찾아왔지만, 그는 그것들을 지그시 억누르며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첫 대회보다 1시간 21초 빠른 3시간 36분 7초 만에 두 번째 풀코스 완주에 성공했다. 이후 전국의 모든 대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뛸 때마다 여러 가지를 얻었다. 자신의 내면과 열정을 확인했고, 유약한 자존심을 강화했다. 달리기가 어찌나 좋은지 2002년 7월에는 길에서 토끼잠을 자며 550km(부산 태종대-임진각)를 1백23시간 동안 달렸다. 지난 5월에는 서울 명동성당을 출발해 수리산(안양)-청계산-남한산성-양수리 등을 거쳐 다시 명동성당으로 돌아오는 220km 거리를 잠 한숨 안자고 34시간 59분 만에 완주한 뒤, 또 다른 마라톤대회에 출전해 풀코스를 완주했다.

올 들어 그가 달린 거리는 약 1500km(연습한 거리까지 합치면 3천km가 넘는다). 풀코스만 스물세 번을 뛰었으니 한 달에 두세 번씩 경기에 참여한 셈이다. 뛸 때마다 구름 위에 올라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그는, 앞으로도 모든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길 위의 철인’답게 목표도 거창하다. 풀코스 1천번 완주, 100km 울트라 마라톤 100번 완주(현재 열 번)가 그것이다. “1년에 서른 번씩 30년 뛰면 못할 일도 아니다. 자신 있다.”
그 옛날 영광을 위해 달리고 또 달리다-전명환 서울시의회 의원

서울시의회 전명환 의원(56)은 한국 아마추어 마라톤 역사의 산 증인이다. 1986년부터 풀코스에 도전해왔으니까 올해로 28년째 달리고 있다. 20여년 전만 해도 마라톤 대회가 거의 없었고 자격 제한이 심해서 풀코스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당시 그의 신장은 155cm. 그 키에 체중이 75kg이어서 뚱뚱하고 굼뜨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게다가 몸속에는 담석까지 자라고 있었다.

마라톤을 시작한 것은 요로 결석 때문에 생기는 통증과, 운동을 안 하면 살이 찌는 이상 체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비만 때문에 42세에 세상을 뜬 동생에 대한 기억도 그의 등을 떠밀었다. 다행히 달리기만 하면 통증이 멎고 체중이 줄었다.

그러나 달리기를 두세 달 멈추면 통증이 도지고 살이 붙었다. 그 바람에 틈만 나면 달려야 했고 수십 차례 풀코스를 완주했다. 1994년에는 국가 대표급 선수들과 경주해 2시간 42분으로 9위를 차지했다. 토요일에 풀코스를 뛰고 그 다음날 다시 풀코스를 뛰는 ‘괴력’을 세 번이나 발휘했다. 2002년 이후에는 100km 울트라 마라톤에 출전해 한국 신기록(8시간 45분)으로 우승했다.

탱크 같은 힘 덕에 그는 2002년 초까지만 해도 아마추어 마라톤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국내 최초로 풀코스를 100번 완주한 박용각씨가 풀코스 완주 예순 번을 넘어섰을 때 그는 이미 아흔세 번을 통과한 ‘선수’였다. 게다가 서브3(2시간대에 완주하는 것)도 여러 번 기록해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2002년 6월, 서울시의회 의원이 되면서 그의 마라톤 인생에 변화가 찾아왔다. 의회 일정에 쫓겨 뛸 기회를 전혀 못 잡은 것이다.

지난 9월5일, 그는 아흔여덟 번째 풀코스에 도전했다가 크게 봉변했다. 반환점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25km를 넘어서자 허벅지 근처가 축축했다. 내려다보니 팬츠 고무줄이 살진 허벅지를 파고들어 피가 새빨갛게 흘러내렸다. 신발이 빨갛게 물들 무렵 진행요원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응급차에 오르십시오. 위험합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자신이 누구던가. 한때 ‘최고’ 소리를 듣던 마라토너가 아니었던가. 뼈와 힘줄, 근육에 무리가 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17km를 걷다시피 해서 마침내 4시간 36분 만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는 “나로서는 최악의 기록이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라고 말했다.

전명환씨의 ‘전설’을 말할 때 황영조 선수를 빼놓을 수 없다. 1999년 3월, 호형호제하던 두 사람은 경주 동아마라톤대회에서 만났다. 그리고 늦게 결승선을 통과한 사람이 저녁을 내기로 약속했다. 황영조가 누구던가. 그러나 전씨는 자신이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해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몸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0km를 나란히 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황씨가 근육에 힘을 주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이렇게 해서는 서브3 못합니다. 먼저 갑니다.” 당시 황씨는 3시간 안에 들어가면 포상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의식한 것 같았다. 점점 멀어지는 황씨를 보며 전씨는 걱정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30km쯤에서 황씨를 만났다. 황씨는 오버 페이스로 처져 있었다. 그는 황씨를 툭 치며 ‘나 먼저 간다’하고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40km를 통과할 즈음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국민 마라토너의 자존심을 짓밟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전씨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거꾸로 뛰는 그를 보며 달려오던 마라토너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38km 지점으로 돌아가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황영조씨가 나타났다. 그는 웃으며 황씨의 등을 두드렸고, 결국 3시간 7분 만에 황씨와 나란히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날 저녁을 황씨가 거하게 냈음은 물론이다.

지난 10월3일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하이서울마라톤대회에서 마침내 100번째 풀코스를 완주했기 때문이다. 기록은 3시간50분대였지만 지난 6개월 동안 연습을 거의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나쁜 기록만은 아니었다. 그는 정치 때문에 목숨 같은 마라톤을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번 임기가 끝나면 마라톤보다 훨씬 힘든 정치는 접고, 사업(과일 경매업)과 마라톤에 매진할 계획이란다. 그는 10km를 뛰면 열 가지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화장품 1천t을 쓴 것보다 더 피부가 고와진다며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몸무게 45kg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성의 ‘괴력’-장영신씨

주말이면 마라톤 대회가 서너 개씩 열리는 요즘 장영신씨(51·서울 잠원동)의 주가는 상한가다. 내로라 하는 신문사들이 그녀를 애타게 부른다. 국내 여성 최초로 도전하는 풀코스 100번 완주를 자기네가 주최하는 마라톤대회에서 달성해 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D-데이로 잡은 것이 10월24일 2004 춘천마라톤대회. 그녀는 요즘 몸만들기에 한창이다.

그녀 역시 마라톤과는 우연히 만났다. 남편을 따라 1997년부터 한강변에 나가 잠깐씩 뛴 것이 달리기 이력의 전부였다. 1998년 3월1일, 그녀는 자신의 심장 기능이 어떤지, 42.195km가 얼마나 되는 거리인지도 모른 채 풀코스에 도전했다. 문제는 신발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굽 높은 신발을 신고 나갔더니 아는 사람들이 ‘놀러 왔느냐’고 빈정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달리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신발을 신고 멋지게 완주해냈다. 기록도 4시간 11분으로 비교적 양호했다.

용기백배한 그녀는 몇달 뒤 동아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어찌어찌 달리다 보니 여성부 2위를 차지했다. 시상대에 올라서 보니 또 다른 쾌감이 있었다. 이후 1주일마다 풀코스에 도전했다. 얼마나 자주 얼굴을 내밀었던지, 뒤쪽에서 ‘입상하기 위해 나왔다’는 쑥덕거림까지 들렸다. 그러나 그녀의 목표는 상이 아니었다. 단지 길 위에 서 있는 자신이 자연의 한 부분이 된 듯해서, 그것이 좋아서 뛸 뿐이었다. 그녀는 “달릴 때마다 수학여행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언제나 가슴이 벅차고 설렌다”라고 말했다. 그 덕에 지난해에 풀코스를 스물여덟 번 완주했고, 올해에도 벌써 스물네 번이나 완주했다(10월10일 현재).

한 달에 두세 차례씩 42.195km를 달렸지만 그녀는 이제껏 한 번도 중도 하차한 적이 없다. 물론 작은 체구로 인해 뛸 때마다 참을 수 없이 힘겨운 순간을 맞는다. ‘이 힘든 짓을 무엇하러 하나’하는 회의감이 그녀의 다리에서 힘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그녀는 그 고비를 ‘마라톤은 체력 30%, 정신력 70%’라는 믿음으로 추스른다. 그렇지만 쉬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주저앉는다. 기록을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달리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요즘은 덜 달리는 편이다. 한창 마라톤에 심취했던 1999~2001년에는 매일 30km 이상을 달렸다. 강인한 훈련은 그녀의 몸에 감추어진 내면의 힘을 불러냈다. 언젠가는 그 매력에 도취되어 새벽 3시까지 달린 적이 있다. 늘 함께 달려주는 남편의 도움이 컸다(그녀의 남편도 풀코스를 일흔 번 이상 완주한 마라톤광이다).

한때 풀코스를 100번 완주한 뒤 승마나 다른 운동을 해볼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라톤 중독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다. 미래에도 더 달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10월17일 그녀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그녀의 이름은 한국 아마추어 마라톤 역사에 새로운 ‘전설’로 기록될 것이다.
사하라 사막 넘어 해발 4천m산맥을 달리다-유지성씨

사막 마라톤은 많은 사람에게 생소하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통해 그 운동이 얼마나 지겹고 고된지 아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어드벤처 레이스 전문 쇼핑몰(www.rxrmall.com)을 운영하는 유지성씨(34·서울)는 바로 그같은 사막 마라톤을 한국에 전파하는 ‘전도사’이다.

5년 전만 해도 그는 한 건설회사의 평범한 직원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근무지가 리비아였다는 것. 그곳 유럽 위성 방송을 통해서 처음으로 사막 마라톤과 만났다. 불볕 더위에 굴하지 않고 망망대해 같은 사막을 헤쳐 가는 구릿빛 참가자들의 의지와 인내력은 놀라웠다. 그러나 그는 운동에 영 소질이 없어서 참가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2001년 9월, 그는 단단히 결심을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지구력을 키우는 달리기가 주된 종목이었다. 6개월간 운동을 한 뒤 그는 2002년 4월에 열린 사하라 사막 마라톤대회에 뛰어들었다.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사막 마라톤이 주는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1주일간 5백80명과 226km를 달리며 새로운 자신과 만났고, 사막이 주는 감동과 아름다움에 흠뻑 젖었다. 기록은 58시간 14분 50초에 불과했지만 그의 귀국길은 행복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사막 마라톤의 매력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아타카마 사막(칠레), 고비 사막(중국), 아마존 강 등지에서 더 험난한 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 대회들은 그에게 언감생심이었다. 경비도 경비였지만 체력에 자신이 없었다. 한 달에 서너 번씩 20~30km를 뛰어 체력을 다지며 마라톤 풀코스, 100km 울트라 마라톤에 도전했다.

2003년 봄, 그는 더욱 단단해진 몸으로 다시 사하라 사막 위에 섰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후미 그룹에서 처진 참가자들을 독려하며 또 다른 재미에 푹 빠졌다. 험로에서 만나서 그런지 모두들 쉽게 친구가 되어갔다(사막 마라톤은 자신이 1주일간 먹을 식량을 모두 짊어지고 달려야 하기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일부 참가자들은 짐을 줄이기 위해 식량을 적게 챙겼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그 해 9월, 그는 고비 사막 마라톤대회에도 도전했다. 250km를 달려야 하는 고비 사막은 사하라 사막보다 훨씬 버거웠다. 해발 4000m가 넘는 산맥을 넘어야 했고, 만년설을 보며 추위에 덜덜 떨었다. 다행히 아름다운 회색빛 사막이 펼치는 풍경이 힘을 보태주었다. 도중에 만나는 실크로드 유적지도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에게 마라톤은 여행이다. 새로운 것과 만나는 시간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내년 9월, 그는 이집트 사하라 사막 마라톤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다. 이 대회를 위해 그는 짬짬이 마라톤 풀코스와 100km 마라톤에 재도전할 생각이다. 그리고 세계의 ‘어드벤처 레이스’ 에이전시답게 많은 사람을 수백km 모험의 길로 안내할 예정이다(국제 사막 마라톤 대회 참가비는 100~3천 달러 수준이다). 여건이 되면 국내에서 어드벤처 레이스 대회도 두 차례 열 계획을 갖고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요, 다만 길이 보일 뿐”-원예식·곽인범 부부

충북 제천시 금성면 활산리는 굽이굽이 산길을 달려가야 나온다. 원예식(39)·곽인범(46) 씨 부부는 그 마을 끝, 허름한 집 세 채가 덩그러니 있는 외딴 곳에 살고 있다. 아침 10시, 그들은 집에 없었다. 울트라 마라톤 출전을 앞두고 연습이라도 하러 간 것일까. 이웃해 사는 박기현씨(38)가 나섰다. 부부는 새벽녘에 품앗이를 나갔다고 했다. 그가 트럭을 몰고 나서더니 금세 부부를 데리고 나타났다. 부부는 둘 다 소리를 못 듣는 청각 장애인이었다. 게다가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수화도 서툴렀다. 박씨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었다.

원씨 부부는 담배 농사를 5천여 평이나 짓는다. 고추·콩 밭도 6천 평이 넘는다. 시골에서 산 사람들은 만 평이 넘는 땅을 부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줄 알 것이다. 사실 이 정도 농사를 지으면 다른 데 한눈 팔 겨를이 없다. 그런데도 부부는 틈만 나면 전국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부부는 벌써 네댓 번씩 풀코스를 완주했다. 부인 원씨는 이미 충청북도에서 소문 난 마라토너인데, 10월 말 서울에서 열리는 100km 울트라 마라톤에도 참가한다.

한없이 바쁘고 불편한 두 사람을 마라톤으로 이끈 사람은 이웃 박기현씨였다. 박씨는 2000년 1월, 제천에 금수산마라톤클럽이 생기자 부부를 클럽에 가입시켰다. 허리를 숙여 일하는 탓에 늘 몸이 아프다는 두 사람의 건강을 위해서였다. 물론 부부는 42.195km를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달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틈만 나면 산길을 내달렸다.

대회에 참가한 것은 그로부터 두어 달 뒤였다. 하프 마라톤의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부부의 쾌감은 절정에 달했다. 달리는 거리가 20km, 30km로 늘어나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 갔다. 생활에 자신감도 생겼고 사람을 기피하는 태도도 사라졌다.

부부는 결승선을 통과할 때의 그 짜릿함에 중독되어 갔다. 그래서 일이 많은 농번기에도 밤길을 달리며 체력을 단련했다. 한창 신이 날 때는 고개를 두세 개씩 넘어 충주까지 다녀왔다. 왕복 80km가 넘는 거리다. 차 소리가 들리지 않아 위험천만했지만 다행히 사고는 없었다. 원씨는 서투른 수화로 “마라톤은 농사보다 훨씬 쉽다. 일 안하고 매일 달리기만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원씨가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하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가 청각 장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울트라 마라톤에 도전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부는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곧장 일손을 기다리는 밭으로 뛰어갔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