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내 정체 이미 알고 있었다”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4.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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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파 공작 ‘위장 간첩’ 김석곤씨/“중정이 위로금 4천만원 약속”
공작명 천보산이 중앙정보부(중정)의 ‘성공한 위장 간첩망’이었다면 암호명 ‘서울 810호’는 실패한 간첩망이다. 서울 810호란 중정이 운영하던 서울 마포아파트의 한 안가에서 혹독한 사상 교육과 특수 훈련을 받은 뒤 장기 침투 임무를 띠고 1968년 10월 철원 근처 비무장지대를 통해 위장 월북했던 김석곤씨(61)를 말한다.

당초 김씨는 정보사 북파공작원 물색조 조○○ 상사에게 발탁되었다가 실력을 인정받아 중앙정보부로 이첩되었다. 당시 중정은 위장으로 의거 월북해 그 체제에서 뿌리 내리고 살 장기 암약 간첩 후보를 찾다가 김씨를 적임자로 택했다. 김씨에게는 그 대가로 4천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1967년부터 김씨는 중정 김○○ 조정관·강○○ 교관과 셋이서 한 조가 되어 마포아파트 안가에서 혹독한 현지 적응 훈련을 받았다. “북에 위장 귀순해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뒤 노동당에 입당하는 등 자리를 잡고서 남쪽 정보원과 접촉해야 한다는 목표로 사회주의 체제 교육과 북한 생활 적응 훈련을 받았다.”

1968년 10월 김씨는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 철원 군사분계선을 통해 두 차례 월북을 시도한 끝에 북한군 초소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귀순 의사를 밝히자 인민군은 그를 철도역이 있는 개성으로 보냈다. 이틀 후 김씨는 열차편으로 평양에 도착했다. 북측은 일단 김씨를 평양교화소 지하 감옥에 가두고 혹독하게 심문했다고 한다. 약 한 달에 걸쳐 중정에서 교육받은 대로 다양한 남한 정보를 제공하고 북한에서 살고 싶다고 요청했다.

김씨는 곧바로 대남공작 담당 부서에 인계되어 대동강변 초대소에서 남파 밀봉교육을 받았다. “신기한 사실은 그곳 대남공작 지도원들이 나를 북파한 중정 조정관 김○○씨와 강 교관을 거명하며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는 점이다. 내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결국 김씨는 북한 체제에 뿌리 내리기는커녕 붙잡혀 단기 간첩 밀봉교육을 받고 월북한 루트를 통해 다시 남파되었다. 내려오는 길에 북한 대남공작 부서의 한 간부가 그를 불러 ‘우리끼리 만나자’는 메시지를 남쪽 당국자에게 전해 달라고 쥐어주었다고 한다.

위장 귀순에 실패하고 두 달 만에 귀환한 김씨는 곧바로 세운상가에 있는 중정 안가에 불려가 한달 동안 북한에서의 행적을 철저히 조사받았다. “처음에는 거의 간첩 취급을 했다. 한달 동안 조사해보고 별 이상이 없자 집에 가서 쉬고 있으면 약속한 위로금을 준다며 교통비 10만원을 쥐어 내보냈다.” 기밀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서를 써주고 나온 김씨는 고향 진주에 내려갔다가 약속한 위로금을 요청하기 위해 중정을 찾았다. 그러나 중정에서는 귀찮게 한다며 김씨를 중부경찰서에 넘겨 1주일간 구류를 살게 했다.

국정원, 지난 7월에야 김씨 행적 인정

처음 그를 물색한 조 아무개 상사를 찾아갔더니 수갑을 채우고 야구방망이로 때리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다. 자포자기해 다시 찾아간 고향 마을에서 그는 어느새 북한 간첩으로 둔갑해 있었다. 중정이 현지 경찰에 요시찰 인물로 지목해 좁은 고향 바닥에 금세 소문이 퍼진 것이다.

2000년부터는 북파 공작원 가운데 유일하게 중정 소속이라는 자격으로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국회 정보위원들에게 청원서를 내는 등 외로운 투쟁을 이어왔다. 지난 30년간 그의 존재를 부정하던 국정원은 지난해 7월에야 그의 모든 행적이 사실이라고 확인하는 답변을 국회에 보냈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늦게나마 김석곤씨의 북파 공적을 확인했고, 국방부와 협의해 보상 방법을 마련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김씨는 현재 자기의 인생 역전을 담은 논픽션 다큐멘터리 <중앙정보부 특수공작원 서울 810호 평양견문록> 집필을 끝내고 출판을 서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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