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돈 주고 샀는데 알고보니 ‘고물 배’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5.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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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근대식 군함 ‘양무호’ 사기 사건 전말/일제 속임수에 놀아나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했던 1903~1910년에 한국 최초의 군함 양무호(揚武號)와 관련된 비운의 역사가 숨어 있다. 양무호의 ‘일생’은 기울어 가던 국운의 축소판이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 양무호가 제물포항(현 인천항)에 도착한 때는 1903년 4월16일. 이 배는 1894년 일본의 미쓰이물산이 영국으로부터 석탄 운반용으로 구입한 3432t급 증기 화물선으로, 원래 이름은 ‘가치다테마루’(勝立丸)였다.

양무호 도입은 근대식 해군을 창설하려는 고종 황제의 염원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은 1890년대 한 차례 해군 창설을 시도했다가 좌절했지만, 그 뒤로도 근대식 해군 창설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자주 국방을 실현하기 위해 군함 확보를 서두른 것이다.

하지만 양무호 도입은 처음부터 대한제국의 무지와 일본의 속임수가 어우러진 희대의 사기 사건이었다. 대한제국은 미쓰이물산이 25만원에 사서 9년 동안 부린 이 선박을 55만원(요즘 시세로는 약 4백40억)에 샀다. 양무호의 기구한 운명을 집중 추적한 김재승씨(현 세동양행 대표 이사)에 따르면, 양무호는 미쓰이물산이 영국으로부터 도입할 당시부터 문제투성이었다. 성능은 부실한데 연료 소모량은 많고, 게다가 자주 기관 고장을 일으켜 미쓰이물산으로서도 처치 곤란 상태였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은 이 선박을 엄청난 ‘바가지’를 쓰고 구입했다. 양무호를 사들이는 데 든 실제 비용은 61만7천여원에 달한다. 화물선을 군함으로 개조하면서 선체 수리비(20만원), 무장 설치비(4만원·정확히는 청일전쟁 때 썼던 일본 구식 군함에서 대포를 뜯어다가 장착하는 데 든 비용), 화약고 신설비(1만원) 등이 추가되었을 뿐 아니라, 최종 인도 때까지의 연체 이자와 보관료가 덧붙었다.

김재승씨가 집필한 <한국근대 해군 창설사> (2000년, 혜안)에 따르면, 1903년도 대한제국 정부의 유일한 대외 지불 수단이었던 해관 수입(세관 수입)은 총 1백43만2천원이었다. 같은 해 정부 재정을 담당했던 대한제국 탁지부가 요청한 1903년 상반기 국비 지출 총액이 17만3천9백여원이었다. 양무호 도입은 당시 정부 1년 예산의 두 배에 가까운 비용이 든 대형 사업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양무호를 실제로 이용한 것은 다름아닌 일본이었다. 양무호는 인도된 지 1년이 가깝도록 제물포항에 계류되어 있었다.

러일전쟁 발발하자 일본군에 징발

제물포항에 떠 있던 양무호는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에 의해 사전 통보 없이 징발되었다. 러일전쟁 개전 초기, 즉 1904년 2월 일본은 양무호를 첩보용으로 이용하다가 전쟁이 본격화하면서 일본 요코스카항으로 끌고 가 탄약고를 신설하고 선실 일부를 개조하는 등 긴급 수리 공사를 한 끝에, 같은 해 4월 전장에 본격 투입했다. 대한제국 정부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항의하자, 일본은 미쓰이물산으로부터 일본 해군이 군함을 빌리는 형식을 취하고, 미쓰이물산은 용선료 일부를 대한제국 정부에 지불하는 조건으로 ‘사후 승낙’을 받았다. 하지만 김재승씨는 용선료 전액을 미쓰이물산이 독식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양무호가 대한제국으로 다시 귀환한 것은 러일전쟁이 종결된 1905년 7월27일. 그러나 이 때 양무호는 이미 일본에 의해 임의로 무장이 해제된 상태였다. 한국에 돌아온 양무호는 화물선으로 이용하기에는 너무 크고, 싣고 다닐 만한 화물도 없어 처치 곤란 상태로 있다가 1907년 무렵 선원 양성용으로 쓰기 위해 부산항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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