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진화’ 시작되는가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5.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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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부부재산제 도입 등으로 대변혁 예고
동갑내기 결혼 5년차 부부인 박준규씨(37·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 수료)와 문현아씨(37·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두 사람의 관계만 놓고 보면 이들은 이상적인 부부이다. 박사 과정 선후배로 만난 두 사람은 관심사가 비슷하다. 세상을 보는 눈도 비슷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고 배려한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이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두 사람이 ‘자발적 무자녀 가족’ 곧 서로 합의에 따라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부부이기 때문이다.

“너 정말 이상하다, 왜 애를 안 낳으려고 그래?”라고 노골적으로 힐난하는 친구로부터 “그냥 애만 낳아라. 그럼 우리가 알아서 다 키워줄께”라고 회유하는 부모님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은 그간 숱한 외압을 견뎌 왔다고 말한다. ‘도대체 우리가 뭣 때문에 이렇게까지 욕을 얻어먹어야 하나’. 돌팔매를 맞으면서도 늘 혼란스러웠다는 두 사람. 두 사람은 우리 사회의 이등 시민이다.

유명 화장품 업체 디자인팀에서 일하는 박성희씨(38·제품그래픽 디자이너). 그녀는 직장에서, 사회에서 알아주는 커리어우먼이다. 그러나 사생활 영역으로 오면 미혼인 그녀는 여전히 ‘온전한 성인’ 취급을 받지 못한다. 미국 유학을 기점 삼아 집에서 나와 독립해 산 지 10년째. 그러나 나이 마흔을 코앞에 둔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호주인 아버지의 호적에 이름이 올라 있는 미성인(未成人)일 따름이다. 그녀는 우리 사회의 이등 시민이다.

1년 전 남편과 헤어진 김경선씨(39·가명). 그녀는 지난 가을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 운동회에 갔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있다. 운동회 프로그램인 ‘아빠와 함께 공 굴리며 달리기’가 화근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이 아빠와 함께 손을 잡고 뛰어 나가자 아들은 금세 풀 죽은 모습이 역력했다.

소설가 공선옥씨의 말마따나 ‘한 집에는 꼭 아빠곰, 엄마곰, 애기곰’이 있어야 ‘정상 가족’이라고 가르치는 우리 사회. 그 속에서 김씨와 아이는 두말할 나위 없는 이등 시민이다.불합리한 차별 받던 ‘이등 시민’들 환호

2005년은 이들에게 시민권 회복의 원년이 될 전망이다. 그 핵심은 역시 호주제 폐지이다. 여야가 합의한 대로 오는 2월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한국의 가족 제도는 반 세기 만에 대전환점을 맞게 된다.

1958년 민법 제정 당시 호주제가 도입될 때부터 여성계는 이 제도가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과 행복 추구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반발해 왔다.

호주제는 빠르게 변화하는 가족 관계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비판을 받아 왔다. 호주제는 호주를 기본으로 ‘호주의 배우자, 혈족과 그 배우자, 기타 민법에 의해 그 가(家)에 입적한 자’만을 가족으로 한정해 왔다. 이 때문에 결혼해서 분가한 차남, 또는 결혼한 딸은 호적상 가족의 범주에 속하지 못했다. 처가쪽 식구도 마찬가지였다. 장인 장모를 10년 넘게 모시고 살아도 이들은 법률상 어디까지나 남남이었다.

그러나 호주제가 폐지되면 이들은 모두 ‘온전한 가족’으로 승격된다. 새 민법은 배우자, 직계 혈족 및 형제자매, 생계를 같이하는 직계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 혈족, 배우자의 형제자매 등을 가족으로 포함하고 있다.

이혼녀나 비혼모 또한 이등 시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새 민법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부성(父姓) 강제’에서 ‘부성 원칙’으로, ‘자(子)의 입적 및 성과 본’ 규정이 완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자녀가 무조건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라야 하는 일은 없어졌다. 곧 혼인 신고 때 부부가 합의하면 자녀는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를 수도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비혼모 또한 자녀에게 자기 성을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그 전에는 비혼모가 아이를 키우다가도 친아버지가 나타나 자기 호적에 아이를 올리면 아이의 성이 자동으로 바뀌게끔 되어 있었다. 재혼한 여성 또한 자기 성이나 새 아빠 성으로 자녀의 성을 변경할 수 있게 되었다.

호주제 폐지뿐만이 아니다. 올해는 가족 틀을 뒤흔드는 혁신적인 법·제도들이 잇달아 등장할 전망이다. 일단 지난해 국회를 통과해 시행을 앞두고 있는 ‘건강 가정 기본법’이 초미의 관심사이다. 이 법은 급격한 이혼율 증가 및 유례 없는 출산력 급감으로 대표되는 한국 가족의 위기 징후를 맞아 우리 사회가 내놓은 첫 공식 대응책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38~39쪽 딸린 기사 참조).

단 이 법안은 ‘건강 가족’이라는 용어 때문에 입법 초기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아 왔다. 이 법은 가족을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 단위’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족, 곧 독신이나 비혼부모 동거 가족, 위탁부모 가족 등은 ‘불건강 가족’이냐고 비판론자들은 반문하고 있다.

부부간 재산 제도 및 이혼 제도와 관련해서도 혁명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지난해 7월부터 민간 전문가를 참여시킨 가운데 ‘가사소년제도 개혁위원회’(위원장 한명숙 열린우리당 의원)를 운영해 온 서울가정법원은 이혼 숙려 제도와 부부재산제 개선을 골자로 한 가사 개혁안을 준비 중이다(38~39쪽 딸린 기사 참조). 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는 안영진 부장판사는 이 제도들이 시행되면 국민 의식이 크게 바뀌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혼 이후 모은 재산에 대해 부부 공동 소유를 인정하는 부부재산제가 도입된다 해도 다양한 예외 규정을 적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재산을 기계적으로 반반씩 나누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안부장판사는 설명했다. 그렇지만 이 제도로 인해 ‘재산의 절반은 무조건 배우자 몫’이라는 인식의 대전환이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것이다.

“가족 해체 가속화” 우려도

가족 관련 법·제도의 이같은 변화는 가족 대변동을 예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같은 대변동이 ‘가족 해체’를 가져올 것인지, 아니면 ‘가족 진화’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첨예하게 갈린다. 성균관 가족법개정대책위원회 최병철 간사(성균관 교육원장)는 “가족 공동체 개념이 무너지고 가족 해체가 심해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 호주제 폐지 운동의 최일선을 지켜온 고은광순씨(한의사)는 “한국 여성이 ‘도구’에서 ‘인간’으로 비로소 거듭나게 됐다”라며 정반대 평가를 내렸다. 그녀는 나아가 가족 해체는커녕 호주제 폐지로 인해 우리 사회의 가족이 진정한 ‘정상 가족’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야 비로소 가족이 ‘하녀 엄마’를 착취하던 구조에서 벗어나 ‘인간 엄마’를 되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여성계는 가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잇단 법·제도 개혁으로 인해 여성뿐 아니라 독거 노인·고아·비혼모 등 사회적 약자들 또한 비로소 기초적인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단 이같은 법·제도 개혁이 현실을 따라잡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라는 비판 또한 받고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상담위원은 “현실의 가족 관계는 무섭도록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법·제도는 한참 처져 있다. 양자의 괴리가 좁혀지지 못하면 가족의 위기는 계속 심해질 수밖에 없다”라고 경고했다.

그나마 이 정도의 개혁 또한 ‘반란군’들의 저항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단행되었다는 것이 2005년판 가족 대변동의 특징이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문현아씨는 사회적으로 책임져 주는 것도 아니면서 맹목적으로 ‘핏줄’을 권하려 드는 사회에 아이 안 낳기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문씨처럼 우리 사회의 가족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는 얼마든지 있다. 이른바 ‘출산 파업’에 동참한 부모들이 대표적인 행동대원들이다. 이들은 이미 한국의 출산율을 최단 기간에 세계 최저 수준(1.17명)으로 떨어뜨리며 그 기동성과 파괴력을 과시한 바 있다.

“호주제는 사적 영역의 국보법이었다”

그런데도 기회만 있으면 ‘왕정 복고’를 꿈꾸는 세력 또한 엄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여야가 호주제 폐지에 합의한 상황이지만 최근덕 성균관장은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국회보다 헌재 결정이 모든 걸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가 관습 헌법을 들어 신행정수도 이전 특별법에 위헌 판결을 내린 이후 성균관은 헌재 판결에 대한 기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여성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반응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이구경숙 부장은 “그런 테러블(terrible)한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그간 사회적 약자들에게 호주제는 ‘사적 영역의 국가보안법’ 같은 존재였다고 <여성과 사회> 편집장 이명호씨(가톨릭대 전임 교수)는 비유한다. 국가보안법이 공적 영역에서 사람들을 억압했듯 호주제는 사적 영역에서 사람들을 옭아매 왔다는 것이다. 법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공화국의 이상과 달리 그간 가족은 호주를 우두머리로 한 견고한 위계 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호주가 무너지는 경험’은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성숙시킬 것이라고 이씨는 전망했다. 한 국가의 우두머리[대통령]를 한 가정의 우두머리[호주]로 등치해 생각하는, 가국적(家國的) 상상력에 변이가 일어남으로써 한국 사회도 드디어 명실상부한 민주 공화국 대열에 진입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2005년 ‘가족발 사회 혁명’의 원년은 이렇게 밝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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