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불러일으킨 ‘4대 여왕’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01.2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류의 핵심은 드라마이고, 드라마의 힘은 작가에게서 나온다. 한국 드라마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오수연·김은숙·김영현·인정옥 씨의 작품 세계에 빠져 보았다.
이탈리아 오페라, 러시아 발레, 영국 뮤지컬, 할리우드 영화, 재패니메이션과 함께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인 문화 상품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는 물론 중동을 넘어 아프리카로, 그리고 미주 대륙까지, 해가 지지 않는 한국 드라마는 세계 곳곳에서 방영되며 한국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음반·영화·드라마가 삼각편대를 이루었던 한류는 <겨울연가> 이후 급속히 드라마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겨울연가> OST 등 드라마 OST가 음반 판매 순위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박용하·류시원 등 드라마에 출연한 탤런트가 가수로 활동하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한 <스캔들> <누구나 비밀은 있다>처럼 배용준·이병헌 등 드라마로 뜬 스타가 출연한 영화가 고가에 수출되고 있다.

한류의 중심을 이루는 한국 드라마의 핵심 경쟁력은 무엇일까? 노련한 PD, 혹은 인기 스타? 방송 관계자들은 대부분 드라마 작가라고 입을 모은다. 요즘 방송가에는 ‘작칠피삼’이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드라마 성공의 결정 요인은 바로 작가가 70%, PD가 30%라는 것이다. 드라마 작가의 비중이 커지면서 작가의 몸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톱 스타와 비견될 정도다.

특히 30대 초중반 여성 작가들이 한국 드라마의 전성기를 이루어내고 있다. 10여 년 전의 한국 드라마와 현재의 한국 드라마를 비교했을 때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바로 드라마의 시선이 남성 PD의 시선에서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트렌디 드라마는 남자 주인공의 성공과 사랑을 중심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요즘은 여자 주인공의 성공과 사랑을 중심으로 드라마가 그려진다. 삼각관계의 중심에 여성이 있다.

인기 드라마를 통해 떠오르는 스타를 보면 이런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드라마가 뜨면 여자 주인공이 떴다. 남자 주인공을 놓고 라이벌과 다투면서 여자 주인공이 여러 가지 매력을 발산했기 때문이다. 최진실 채시라 고현정 심은하 김희선 전지현 송혜교까지, 인기 드라마가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여성 스타가 남았다. 드라마를 통해 시대가 원하는 여성상을 구현하고 이들은 톱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천국의 계단> <불새> <파리의 연인> <풀 하우스> 같은 인기 드라마는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두고 삼각관계를 풀어갔다. 그런데 최지우 이은주 김정은 송혜교 등 정상급 여성 연기자가 출연했는데도 드라마를 통해 주목된 사람은 권상우 에릭 박신양 비 등 남성 연기자였다.
<시사저널>은 한류의 핵심 경쟁력을 보유한 여성 드라마 작가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았다. <가을동화>의 오수연씨, <파리의 연인>의 김은숙씨, <대장금>의 김영현씨 등 한류를 이끄는 드라마 작가와 미래의 드라마에 맞는 감수성을 보여주는 <아일랜드>의 작가 인정옥씨의 작품 세계를 살폈다.

오수연,한국문화의 보편성으로 승부

<겨울연가>로 폭발하기는 했지만, 애초 일본 한류의 시작은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이었다. 재일동포 성칠룡씨가 <이브의 모든 것>을 일본 공중파 방송에 판매해 방송되게 함으로써 한국 드라마가 일본의 안방극장에 전달되었다. <이브의 모든 것>을 통해 한국 드라마의 재미가 일본에 알려지면서 한국 드라마 붐이 서서히 불기 시작했다.

<이브의 모든 것>의 대본을 쓴 오수연씨는 인간의 보편성에 주목하는 작가다. 과학철학을 전공한 그녀는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를 천착하고 인간의 보편적인 꿈을 실현하는 데 무게 중심을 둔다. 그녀가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로 사랑을 풀어간 <가을동화>는 중화권에서, ‘첫사랑의 판타지’라는 보편적인 꿈을 실현하는 데 주력한 <겨울연가>(스토리텔러로 참가함)는 일본에서 한류의 주역이 되었다.

구성이 잘 짜인 드라마로 인정받는 <가을동화>와 <겨울연가>는 한국과 일본의 드라마 평론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들었다. <가을동화>와 <겨울연가>에서 윤석호 PD와 함께 작업한 그녀는 특별히 영상 언어에 주목했다. 아름다운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세련된 멜로에 시청자는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결혼과 함께 펜을 놓았던 그녀는 최근 중매 결혼 이야기를 담은 새로운 작품 구상에 들어갔다.
김은숙,캔디렐라’ 드라마 완성

부모 세대의 불륜, 이복형제 혹은 이복자매 간의 사랑다툼, 이를 좀더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불치병과 기억상실증. 트렌디 드라마의 필수 요소들이다. 이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트렌디 드라마의 흥행 코드는 바로 ‘캔디렐라’다. 캔디와 신데렐라의 합성어인 이 말은 드라마에서 캔디처럼 서민적인 주인공이 신데렐라가 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현실에 두 발을 딛고서 손으로 별을 따는 ‘캔디렐라’ 드라마는 현실과 판타지의 환상 결합이다. 캔디 캐릭터를 통해 현실감을 더해 감정 이입을 쉽게 만들고, 신데렐라가 되는 과정을 통해 여성들의 판타지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자신을 ‘캔디렐라’에 ‘빙의’할 수 있도록 작가는 갖가지 장치를 드라마 속에 심어 놓는다.

친구인 강은정씨와 <파리의 연인> 대본을 쓴 김은숙씨는 ‘캔디렐라’ 드라마의 형식미를 완성한 작가다. 재벌 2세와 가난한 여주인공의 사랑을 <파리의 연인>은 갖가지 설정과 에피소드를 통해 설득력 있게 풀어갔다. 필리핀과 타이완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파리의 연인>은 올해 3월 일본에서 방영되어 <겨울연가> 신화를 이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영현, 사극의 새 전형 만들다

방송 관계자들은 한국 드라마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여성 작가로 김수현씨와 송지나씨를 꼽는다. 김수현씨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깨뜨리고 여성의 자의식을 드러낸 드라마로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모래시계> 대본을 쓴 송지나씨 역시 남성의 영역으로만 생각되었던 힘과 권력 문제를 드라마의 소재로 삼음으로써 금녀의 벽을 깼다. <대장금> 대본을 쓴 김영현씨는 여성 작가의 영역을 사극으로까지 넓힘으로써 김수현·송지나 씨 못지 않은 업적을 이룩했다. <대장금>은 궁중 암투나 치정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전문 사극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었다.

타이완 등에서 한류의 중핵을 담당하고 있는 <대장금>의 장점은 드라마를 통해 우리 음식 문화의 우수성까지 함께 알릴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 위성 방송에서 방영 중인 <대장금>은 조금씩 인기를 모으면서 <겨울연가>에 이어 또 한 차례 한류를 예고하고 있다. 김영현씨는 <대장금>에서 호흡을 맞추었던 이병훈 PD와 백제를 배경으로 한 사극 <서동요>를 준비하고 있다.

인정옥, 대한민국 드라마의 미래

<네멋대로 해라>와 <아일랜드>의 대본을 쓴 인정옥씨는 폐인을 몰고 다니는 작가다. 드라마가 방영될 때마다 시청률은 그리 높지 않지만, 소수의 열광적인 관심으로 인해 늘 화제를 몰고 다닌다. 인씨의 강점은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쿨한 정서다. 그녀의 드라마에 나오는 쿨한 주인공에게 마니아들은 ‘침묵하는 다수’에서 ‘행동하는 소수’로 바뀌어 열광한다(82~83쪽 딸린 기사 참조).

방송 관계자들이 인씨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녀의 드라마가 보여주는 미래적 정서 때문이다.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반응이 이후 대중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멋대로 해라>나 <아일랜드>와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함으로써 이런 예언은 실현되었다.

한류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지만 요즘 드라마 제작사들은 큰 딜레마에 처해 있다. 스타들의 몸값은 기하급수적으로 오른 반면, 제작비는 그대로여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이다. 제작자들은 이런 스타 시스템의 대항마로 작가에게 주목한다. 탄탄한 대본을 바탕으로 한 작가주의 드라마로 드라마가 스타 시스템에 의해 왜곡되는 것을 막아 달라는 것이다.

우리 대중 문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드라마 작가들이 평론가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숲만 보지 말고 나무도 보아 달라는 것이다. 오수연 작가는 “비슷해 보이는 드라마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차이가 많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구조적으로만 분석하려 할 뿐 그 차이를 보려 하지 않는다. 애정 어린 시선이 아쉽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