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 비리 사건은 사측 음모다”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5.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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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차 노동자들, 3대 의혹 제기…“노조 무력화 노린 극약 처방” 주장
‘귀족 노조의 취업 장사.’ 주류 언론은 기아자동차(기아차) 채용 비리 사건을 이와 같이 간단하게 규정했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경영권까지 침해하는 월권 행위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기아차 파동의 본질을 헤아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번 사건은 기아 스포티지의 폭발적인 흥행에서 출발한다. 생산 라인 증설이 필요했던 기아차 광주공장은 지난해 5~7월 생산 계약직원 1천79명을 뽑았다. 이 가운데 부적격자가 무려 3백99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지역 유력 인사·회사 간부·노조 등의 추천을 받고 입사한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바로 드러났다. 지난해 8월부터 광주공장 채용 비리와 관련해 투서가 나돌았다. 노동자 조직의 한 계파인 ‘전진하는 노동자회’는 이 문제를 적극 제기했다. 9월부터 경찰은 내사에 들어갔고, 회사측도 자체 감사를 시작했다.

지역 신문인 전남매일은 지난해 10월7일자 기사에서 ‘입사하려면 3천만원 써야?’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생산계약직 채용과 관련해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즈음 기아차 본부 노조는 회사측에 ‘채용 할당’에 관한 항의 공문을 보냈다. 한 감사실 관계자는 “경영진이 노조 간부의 채용 비리 및 인사 관련 직원의 금품 수수 정황을 파악했다. 10월 말 해당 직원들에게 주의를 주는 선에서 종결했다”라고 말했다.

본격적인 검찰 수사는 1월 말에야 시작되었다. 기아차 광주공장 노조지부장 정 아무개씨가 채용을 대가로 2억여원을 받아 구속되었다. 또 다른 노조 간부도 돈을 받고 취업을 시켜준 것으로 드러났다. 사측은 이같은 비정상적인 인사 비리가 노조의 협박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아차의 한 간부는 “파업을 불사하고 언제라도 생산 라인을 세울 수 있는 무서운 노조의 힘 앞에서 회사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로 현대차 사주 큰 이득 볼 것”

하지만 수사가 확대되면서 이른바 ‘채용 전문 브로커’가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고, 인사 담당자의 금품 수수 사실이 확인되었다. 노동청을 비롯한 관련 인사들은 물론, 정치인까지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취업 장사’는 구조적인 비리이기 때문에 노조가 아니라 경영진이 그 주체였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자 일부 기아차 노동자들은 이번 사태를 사측이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해 내린 극약 처방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광주공장 노동자 중에는 회사측 농간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많았다. 기아차 광주공장 조립팀의 한 직원은 “김대중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의 독대로 겨우 살아난 광주공장이 다시 정치·경제 논리에 희생되고 있다. 이 사태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것이 경영권 이양을 앞둔 현대자동차 사주와 경영인들 아니냐”라며 음모론을 주장했다.

이들이 음모론을 주장하는 첫 번째 이유는 사건이 이슈화한 시점이다. 지난해 10월 회사측의 감사로 사건은 잠잠해졌다. 그 뒤 기아차 경영진은 12월30일자로 광주공장 인사담당 이사와 인사팀 직원들을 면직하고 퇴사 조처했다. 지난 1월 초에는 윤국진 기아차 사장을 비롯해 광주공장장과 인사실장을 경질했다.

노동자들은 사측이 문제된 경영진을 정리하고 난 뒤, 노조에 대한 심판을 수사기관과 언론에 맡겼다고 주장한다. 지난 1월26일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은 “기아차 노조도 임단협 과정에서 취업 비리를 문제 삼았다. 수사기관이 일찌감치 노조 간부의 비리를 포착했으면서도 비정규직 법안 처리에 임박해 터뜨린 것에 대해서 대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 이유는, 회사측의 계획적인 도발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아차 광주공장은 지난해 비정규 생산직을 뽑으면서 ‘만 29세 이하, 고졸자, 신체 건강자’를 조건으로 제시했다. 회사가 지난해 10월 실시한 감사에서 드러난 부적격 합격자 3백99명 중 전문대 졸업자는 3백명 가량, 대졸자는 40명 정도 된다는 것이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기아차는 지난해 채용 최종 심사 과정에서 전문대 졸업생과 4년제 대학 졸업자에게도 지원 자격을 주는 것으로 기준을 바꾸었다. 노조 알레르기가 있는 대기업의 경우, 생산직 사원으로 공고 졸업생을 선호하고, 대학을 1년이라도 다닌 사람은 기피한다. 한 대기업 노무 관계자는 “대학을 1년이라도 다닌 사람은 근로 여건에 대한 불만이 많다. 이들은 노조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 채용을 기피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노조가 실력 행사를 했더라도 대학생 출신 사원을 채용한 것은 회사측의 적극 개입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른 기업 노무 담당자는 “대학 출신 생산직 직원을 채용한다는 것은 한국 대기업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광주공장의 전 인사담당 직원은 “공장장 등의 지시로 학력 문제에 대한 규정을 바꾼 것에 대해 내부에서 문제 제기가 컸다”라고 말했다.

회사 인사 핵심 간부가 아니면 모르는 내용과 채용 관련 서류가 유출되고 있다는 점 또한 노동자들의 의심을 부채질한다. 유출된 채용 문건에는 노조 광주지부장이 추천한 2명을 비롯해 지방 노동청·경찰 등 외부에서 추천한 내역도 들어 있다. 그러나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 등 이른바 힘 있는 권력 기관 인사들은 빠져 있다. 광주공장의 한 노조원은 “우리는 사측이 전진하는노동자회를 통해 사건을 터뜨리고 문건을 유포했다고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핵심 간부만 아는 채용 내용 어떻게 유출됐나

세 번째는 채용 비리가 광주공장만의 문제가 아닌데 이를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기아차 소하리공장에서 최근 퇴사한 김 아무개씨는 “기아차의 추천인 제도는 후견인 제도이자 책임자 제도이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비뚤어져 버렸지만, 기아차는 연줄을 타고 들어오는 기업이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나도 회사 간부를 통해 노조에 눈도장을 찍고 입사했다”라고 말했다. 화성공장의 한 직원은 “회사의 과장 이상 줄이면 일단 비정규직으로 들어가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 문제가 없다. 김선홍 회장 때부터 노조 간부를 통해 입사하는 사람이 가장 빠르고 가장 좋은 자리로 간다”라고 말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현대자동차(현대차)도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 현대차 울산·전주·아산 세 공장에서 이루어진 생산직 채용에서 사측과 노조의 비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2년 전 울산공장에 취업한 한 직원은 브로커를 통해 3천만원을 주고 채용되었다고 한다. 현대차 아산공장의 한 생산직 직원은 “지난해 회사 간부에게 4천만원을 주고 입사했다. 이 중 일부는 친한 노조 간부에게 갔다고 들었다”라고 말했다.

사측 “노조가 물귀신 작전 쓰고 있다”

전주공장의 전 직원은 결격 사유가 있는 자신을 회사 간부가 노조에 인사시킨 후 입사시켰다고 주장했다. 이 직원은 “고등학교를 중퇴했다고 했더니 브로커를 소개해 주었고, 브로커가 관련 서류를 만들어주었다. 졸업장을 만드는 데만 6백만원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현대차 노조 홈페이지 등에 입사 비리 제보가 계속 오르고 있어 회사 쪽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차에서는 불법 채용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위와 같은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노조 간부는 “현대차 채용 비리 문제가 공공연히 문제가 되기도 했다. ‘누구는 얼마짜리다’ ‘정규직 전환을 위해 얼마가 든다’는 말이 나돈다”라고 말했다.

기아차 광주공장의 채용 비리가 불거진 것이 사측의 음모라는 일부 노동자들의 주장에 대해 사측은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입장이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들은 “노조가 물귀신 작전을 쓰고 있다. 회사에서 자료를 파기하는 등 수사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자료 유출 등 노동자들의 일부 주장에 대해 사측은 1월28일 현재까지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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