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의 대북 정책 ‘숨은 손’ 아미티지
  • 남문희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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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정책 막후 실세, 6자 회담 협상안 등 주도 북한도 <아미티지 보고서> 원용해 미국에 대응
아미티지를 주목하라.’ 8월 27일부터 베이징에서 열리는 6자 회담을 앞두고 미국 대북정책의 막후 실세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떠오르고 있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들은 8월7일 파월 국무장관이 발표한 북한 체제 보장안이나 6자 회담에서 발표할 미국측 협상안을 주도해온 인물로 아미티지 부장관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아미티지 부장관은 최근 북한 체제 보장안을 둘러싼 내부 권력 투쟁에서 국무부의 승리를 이끌어 내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지난 8월7일 파월 국무장관이 발표한 일련의 북한 체제 보장안을 둘러싸고 워싱턴에서는 국무부를 한 축으로 하고, 국방부를 중심으로 한 네오콘과 의회 강경파를 또 한 축으로 하여 혈투가 벌어졌다. 그 와중에서 정연한 논리로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결국 국무부의 손을 들어주게 한 인물이 아미티지 부장관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먼저 핵 포기를 선언하지 않는 한 미국은 어떤 것도 제시해서는 안된다는 강경파에 맞서, 미국이 아무런 안을 내놓지 않을 경우 6자 회담에서 주도력을 발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회담이 실패로 돌아가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이 중재 노력을 포기하게 될 것이고, 미·중 관계가 악화함으로써 대북 제재 국면이 닥쳐도 중국의 협조를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미티지가 예측한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북한 체제 보장안을 둘러싼 이같은 일련의 혈투를 거치면서 미국의 대북 라인은 파월 국무장관-아미티지 부장관-제임스 켈리 차관보로 이어지는 국무부 협상팀이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아미티지 부장관의 비중이 더욱 커졌다는 것이다.

아미티지의 위상은 미국이 현재 구상한 대북 협상안이 1999년 그가 주도해 작성한 <아미티지 보고서>에 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워싱턴의 또 다른 외교 소식통은 지난 8월12일 전화 통화에서 “미국이 6자 회담에 어떤 안을 들고 갈지는 이미 <아미티지 보고서>에 다 나와 있다”라고 지적했다.

<아미티지 보고서>란 클린턴 행정부 때 윌리엄 페리 대북 정책 조정관의 <페리 보고서>에 맞서, 당시 아미티지를 중심으로 한 공화당 대북 정책 그룹이 총출동해 작성한 정책 보고서를 말한다. 아미티지 부장관 외에도 폴 월포위츠 현 국방부 부장관을 비롯해 로머트 매닝·피터 브룩스 등 부시 행정부 외교 안보 관련 인사의 상당수가 당시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

클린턴 정부의 <페리 보고서>가 북한 체제의 현실을 인정하면서 북·미 관계 로드맵(단계적 실행 방안)을 밝혔다면, <아미티지 보고서>는 북한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대북 억지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차별화를 꾀했다. 그러나 북한이 호응할 경우에는 클린턴 정권보다 훨씬 과감하게 북한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부시 대통령이 거듭해서 밝힌 ‘대담한 접근’의 이론적 근거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셈이다.

최근 미국 언론들의 보도를 분석해 보면, 이 보고서에 입각한 ‘대담한 접근’이 선보일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지난 8월14일자 CNN 인터넷 판은 미국 행정부 고위 관리 2명의 말을 인용해 6자 회담에 내놓을 미국측 안의 골자를 밝혔다. 즉 미국은 베이징 회담에서 ‘안보 코뮈니케’ 형식으로 북한의 안보를 보장하고 이를 의회에서 결의하는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대북 지원에 대해서는 ‘무역 제재를 해제하거나 북한이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차관을 얻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 같은 인센티브도 포함된다.

북한의 안전 보장에 대해 <아미티지 보고서>는 ‘한국·일본과 더불어 미국은 북한의 안보를 다루기 위한 6자 회담을 제안해야 하며, 불가침 공약으로부터 북한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한다는 공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범위에서 안전 보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최근의 6자 회담 국면과 불가침에 대한 북한의 주장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경제 지원에 대해서는 ‘식량 및 의료품 등의 인도적 지원을 계속’하는 것 외에도 ‘제재를 더욱 완화하고 국제 금융기구 가입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세계은행 혹은 아시아개발은행 내에 한반도 재건 기금 설립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밖에도 경수로를 폐지하고 다른 에너지(화력 발전)로 대체하는 방안을 비롯해, 주한미군 전력 재편 움직임이나 선제 공격 문제 등 북한 핵 문제 재발 이후 부시 행정부가 선보인 낯익은 개념들의 원초적인 아이디어가 이 보고서에 입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북한측 역시 이 보고서를 원용해 대응해 왔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4월의 베이징 회담이다. 당시 북한 이 근 대표는 핵 보유 발언으로 충격을 주기 이전에 해법안을 제시했다. 이 해법안을 둘러싸고 국내외 언론들은 ‘단계별로 북한이 취할 것을 다 취한 뒤 핵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라며 비판적으로 해석했고, 윤영관 외교부장관 역시 같은 이유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워싱턴 소식통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의 결론은 매우 달랐다. 즉 이 근의 당시 발언을 상세히 분석한 결과 그가 주장한 것은 단계별 해법이 아니라 <아미티지 보고서>에서 주장된 것과 같은 일괄 타결안이며, 다만 실행 순서만 단계적으로 하자는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 소식통은 “당시 북한이 <아미티지 보고서>를 참고해 상당히 양보했음이 드러났고, 이런 이유로 아미티지 부장관이 매우 좋아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동안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북한 핵 문제 재발 이후 아미티지 부장관은 대북 협상의 전면에 나서려 했다. 지난 1월10일,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와 한성렬 북한 유엔대표부 차석대사 사이에 10여 시간의 마라톤 협상이 있었는데, 당시 이 회담이 성공할 경우 아미티지 부장관과 북한 외교부 강석주 제1부부장의 고위급 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갑작스런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 강행으로 이 계획이 무산되고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발호가 이어지자 그는 때를 기다려 왔다.

그러다가 8월 초에 접어들면서 6자 회담의 윤곽이 잡혀가기 시작하자 그는 또다시 대북 협상의 전면에 등장했다. 지난 8월4일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오랫동안 약한 패를 들고서도 게임을 매우 잘해온 사람 … 빈틈없는(canny) 인물’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물론, 지난 8월6일에는 미국 정부가 ‘북한의 미래를 위한 긍정적인 대안을 포함해 광범위한 이슈를 놓고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 발언 등이 그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북한 역시 얼마 전 평양을 방문한 왕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에게 6자 회담 대표로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이 참여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아미티지 부장관이 협상 대표로 참여해 달라고 종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현재 워싱턴 정가에는 제임스 켈리가 일단 6자 회담 대표로 참석하지만 아미티지 부장관이 실질적으로 막후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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