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의 새 '북핵 해결사' 떴다
  • 남문희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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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로브 백악관 수석정치고문과 대통령재선위, ‘대북 정책’ 좌우
9월1일 노동절을 계기로 미국 워싱턴은 가을 정국에 돌입했다. 크로퍼드 목장에서 휴가를 즐기던 조지 부시 대통령도 백악관으로 복귀했고, 상하 양원 의회도 회기를 시작했다. 가을 정국의 핵심 화두는 내년 11월로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이다. 벌써부터 재선을 노리는 부시 대통령 진영과 하워드 딘 전 버몬트 주지사를 선두로 한 민주당 ‘9룡’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미국이 대선 정국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북한 핵 문제 역시 미국의 정치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국무부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와 국방부 및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 역시 대선 바람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 치열하게 접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국내외의 일부 진보 학자나 전문가 들은 내년의 미국 대선이 자칫하면 한반도 상황에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해 왔다. 대북 강경파인 네오콘이 전쟁이나 외교 현안 앞에서는 똘똘 뭉치는 미국인의 습성을 악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었다. 실제로 최근 워싱턴 소식통들에 따르면, 네오콘은 내년 대선을 대북 강경 정책에 연결할 호기로 보고 잔뜩 벼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예상하는 대로라면 진정한 위기는 내년에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같은 강풍 시나리오보다는 온풍 시나리오가 우세해 보인다. 현재 부시 대통령이 처한 국내외 상황 때문에라도 강공책을 구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렁에 빠져 해법이 보이지 않는 이라크 상황, 거듭되는 전쟁으로 사상 최대 규모로 확대된 재정 적자, 경제난과 취업난 등 악재가 즐비하다. 이미 국민 지지율이 50% 이하로 떨어진 상황에서 무리한 대북 강경책은 정권 자체에 부담을 줄 뿐 아니라 내년 대선에도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이 전했다.

이같은 설왕설래 과정을 거쳐 지금은 일단 대북 온풍 정책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의 또 다른 소식통은 “부시 대통령과 국무부는 북한이 9·9절 행사를 조용히 넘겨주기를 손꼽아 기다렸다”라고 전했다. 국무부도 국무부지만 부시 대통령 자신이 북한과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이 베이징 6자 회담 이후 국무부의 손을 들어주면서, 다만 북한이 이번 9·9절을 조용히 넘기는 것을 단서로 달았다”라고 이 정보 소식통은 전했다.

반면에 국방부와 네오콘은 북한이 미국 전역에 도달할 신형 미사일을 개발했다고 미확인 정보를 흘리는 등 군불을 지펴 왔다. 그들은 북한이 뭔가 일을 저질러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일본의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원래 북한측 일정으로는 이번 9·9절에 핵 보유 선언 등 ‘한 건’을 하기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9·9절이 조용히 넘어갔는데, 그것은 북한 역시 워싱턴의 분위기를 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워싱턴의 소식통은 “북한은 겉으로는 6자 회담 이후 미국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려 왔지만 실제로는 다음 회담을 상당히 기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즉 다음 회담 때는 지난번 회담과 달리 북·미 양측이 실질적인 협의를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6자 회담에 앞서 북·미 양자 회담에서 체제 안전과 핵 문제에 대해 동시 행동 조처를 이끌어낸다는 것이 북한의 전략이다”라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북측의 머리에도 미국 대선이라는 변수가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대선이 일단은 북한에 따뜻한 바람이 되리라고 판단하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대선 과정에서 미국의 대북 정책은 국무부와 국방부의 정책 부서를 뛰어넘는 제3의 실체에 의해 좌우된다. 현재 워싱턴의 정보 소식통들이 주목하는 제3의 실체는 칼 로브 백악관 수석정치고문(52)과 그가 총괄하는 부시 대통령 재선위원회이다.

지난 8월3일 는 미국의 대외 정책 방향과 관련해 매우 주목할 기사를 실었다. ‘미국 외교 정책, 교차로에 도달’이라는 제목을 단 분석 기사에서 이 신문은 ‘앞으로 1년 반 동안 전세계 분쟁 지역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접근법은 과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여준 힘에 의한 해결과는 두드러지게 대비될 것이다. 기존 정책이 위험 부담이 큰(high-stakes) 전쟁 정책이었다면, 앞으로는 출구 전략(exit strategies)으로 초점이 이동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는 부시 행정부의 정책이 변한 이유로 내년 11월의 대선을 지적하면서 ‘(앞으로) 주요 외교 정책 연주자는 국방부도 국무부도 아닌 백악관의 칼 로브 수석정치고문이 된다. 모든 외교 정책 결정과 구상은 대선 과정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투영된다’라는 모이제스 네임 <포린 폴리시> 편집장의 코멘트를 실었다.
지난 8월 말 서울을 방문한 워싱턴 외교 소식통 역시 기자에게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칼 로브와 부시 대통령 재선위원회가 대북 정책 방향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칼 로브 수석정치고문이 한반도 문제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그간의 단편적 행적을 통해 추론할 뿐이다.

우선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그의 실체가 처음 눈길을 끌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 노무현 대통령 방미 때였다. 당시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 국내 정치를 담당한 그가 참석한 사실이 미국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미국의 차기 대선과 한반도 상황의 연관성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었다. 5월 말 커트 웰던 미국 하원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미국 하원의원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할 때 그와 조율한 사실도 최근 밝혀졌다. 당시 국무부나 국방부 등 기존 정책 라인은 웰던 의원의 평양 방문을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칼 로브 고문의 보이지 않는 후원으로 성사되었다고 한다.

대북 업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칼 로브 고문을 접촉한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그는 네오콘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리고 매우 실리적인 사람이다”라고 평했다. 다시 말해 내년 대선에서 어떤 정책이 부시의 재선에 유리할지 냉정하게 계산해 움직이리라는 지적이다. 현재까지는 부시 정부의 대외 정책이 수렁에 빠진 상태여서 대북 온풍 정책을 하나의 탈출구로 삼으려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북한이 지나친 자신감에 들떠 미국 여론을 악화시킬 경우 언제든 그 반대도 성립할 수 있다.

칼 로브 고문을 중심으로 한 재선위원회가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6월께로 알려졌다. 이 위원회는 현재 공화당전국위원회의(RNC)의 막강한 후원을 발판으로 오직 내년 대선 승리라는 잣대로 기존 대내외 정책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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