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피해 어린이 엄마의 ''법정눈물''
  • 신호철 ()
  • 승인 2003.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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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성추행 피의자 무죄 선고…재판 출석 않는다고 “증거 능력 부족”
'과연 어린이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타당한 일인가?’ 2003년 들어 우리 사회는 이 낯선 질문을 연거푸 두 번째 받고 있다. 첫 번째는 올해 초 이른바 ‘영국 사건’이라고 불리는 어린이 성폭행 사건 때였다(<시사저널> 제711호 참조). 영국에 살고 있던 한 아이가 한국의 친척집에 잠시 체류하다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건이다. 사법부는 영국에 있는 아이에게 증인으로 출석하라며 귀국을 종용했다. 재판부의 이러한 처사가 과연 옳았느냐를 놓고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다. 11월2일 서울지법 이대경 부장판사가 이 사건 피해 어린이의 ‘비디오 테이프 진술의 증거 능력을 인정할 수도 있다’고 발언해 그것이 실현될지 주목된다.

최근에는 이와 유사한 사건으로 또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번 송사의 당사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영국 사건’을 세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어린이성폭행피해자가족모임 송영옥 대표의 딸이다.지난 10월30일 이전까지만 해도 2003년은 이 모임의 송영옥 대표(44)에게 화려한 한 해였다. ‘영국 사건’의 여파 덕분인지 성폭행 어린이 전담 검사제 실시, 어린이에 대한 반복 증언 제도 개선, 비디오 녹화 제도 실시 등 그녀가 오래 전부터 주장했던 일들이 올해 들어 하나둘씩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 성과로 인해 그녀는 한 일간지로부터 ‘평화 인물’로 선정되는가 하면, ‘금주의 인물’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9월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반가운 것이었다. 9월22일 서울지법 서부지원 형사1단독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송영옥씨의 딸을 성추행한 혐의로 유치원 운영자 홍 아무개씨(57)에 대해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이 유치원 성폭행 의혹 사건은 송영옥씨가 어린이성폭행피해자가족모임을 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98년 5월 송씨는 자신의 딸 이 아무개양(당시 5세)을 성추행한 혐의로 딸이 다니던 유치원 원장 홍씨를 미성년자강제추행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 아무개양의 증언이 구체적이지 않고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불기소 처분했다. 송영옥씨가 항고를 내 검찰이 재수사를 했지만 역시 기소하지 않았다. 집념 어린 송영옥씨는 검사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2002년 8월 불기소처분취소결정을 받아냈다. 지난 9월22일의 공판은 장장 5년이 넘게 법정 투쟁을 해 온 송영옥씨에게는 큰 전환점이 될 법했다. 송씨는 민사 소송에서는 홍씨를 상대로 이미 승소한 상태였다.

그러나 10월30일 서울지법 서부지원 형사1단독 안승국 부장판사는 1심 선고 공판에서 홍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 당사자인 송씨의 딸이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피해자가 증거로 낸 경찰·검찰에서의 진술 조서로는 증거 능력이 부족하다”라고 밝혔다. 송영옥 대표는 “지난 수년 동안 딸의 정신적 후유증을 겨우 치료했는데 이제 와서 ‘너 그때 성폭행 당한 거 기억나지?’라며 아이를 법정에 세울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1998년에 검찰이 바로 기소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재판을 공정하게 받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한편 피의자 홍 아무개씨는 “이 모든 것은 송씨의 자작극이다. 아이가 진실을 말할까 봐 출석을 막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안승국 판사는 “재판은 법정에서 받는 것이다. 영국 사건의 경우 해외에 살고 있다는 점이 특신 사유가 될 일말의 여지가 있지만 송영옥씨 딸 사건은 그럴 여지가 없었다. 법을 바꾸지 않는 한 판사로서는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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