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소비자, 정유사에 연간2조원 바가지 썼다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0.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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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혈 수출한다”는 정유사 주장은 엄살…내수용 공장도가격보다 싸게 팔고도 이윤 남겨
유가 폭등 사태를 맞아 국민 경제 전반에 주름살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폭리를 취하는 곳이 있다. 해외에서 원유를 도입해 정제한 후 국내에 공급하는 국내 5대 정유사들이다. 국내 정유사들은 지난 한 해 각종 석유류 9억1천백만여 배럴을 정제했는데, 놀랍게도 이 가운데 3분의 1 가량을 해외로 수출했다. 총수출 물량은 2억9천8백만 배럴로 전체 석유류 생산량의 33%를 외국에 내다 판 셈이다. 올 들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지난 7개월 동안 정유사들이 원유를 도입해 생산한 석유류는 총 5억4천만 배럴이었다. 역시 이 중 1억7천3백만 배럴을 해외에 수출해 수출 비중은 지난해와 비슷한 32.2%에 달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원유를 과다 수입해 해외에 되파는 장사를 해온 셈이다.

문제는 이렇게 해외에 수출하는 석유류의 가격이 국내 소비자 가격은 물론 공장도 세전(稅前) 가격에 비해서도 터무니없이 낮다는 데 있다. 지난 1년6개월 동안 국내 정유사가 생산한 석유류 제품 중 산업자원부에 공장도 세전 가격을 통보하는 휘발유·경유·실내 등유·보일러 등유·벙커C유의 수출 실적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국내 공장도 가격 대비 수출 가격의 차액은 무려 3조원을 웃돈다. 단순하게 보면 정유사들은 이 기간에 공장도 가격보다 3조원이나 손해를 보며 외국에 석유류를 판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정유사들도 수입한 원유를 정제한 후 국내 소비가 제대로 안된 잉여 부분을 불가피하게 제조 원가보다 낮게 덤핑 수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정유사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고 해도 문제는 심각하다. 정유사들이 해마다 무려 33%에 이르는 석유류를 해외에 내다 팔면서 제조 원가보다 낮게 출혈 수출을 하고 있다면 그 손실분은 고스란히 국내 소비자들이 사는 유류 가격에 전가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유사의 주장과 달리 해외 수출 석유류 가격이 결코 제품 원가 이하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소속 조희욱 의원(자민련)이 입수해 분석한 국정감사준비자료를 통해 확인되었다. 그가 1999년도 국내 정유사의 재무제표를 제출받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정유사들의 총매출액 가운데 수출액이 차지하는 비율과 총생산량 중 수출량이 차지하는 비율을 비교할 때 그 차이가 거의 없다는 점이 드러났다(18쪽 맨 아래 표 참조). 이는 곧 국내 정유사들이 해외로 수출하는 석유류 가격이 원가 이하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아울러 수출 가격 자체가 생산 원가 수준이라고 보아야 타당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정유사가 산자부에 통보하는 석유류의 국내 공장도 세전 가격(원가) 자체가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출혈 수출을 하고 있다는 정유사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수출 가격이 원가 이하라면 국내에서 생산된 석유류를 수입하는 나라에서는 당연히 석유제품에 대하여 덤핑 관세를 부과하게 되어 있다. 국내 석유류를 수입해 가는 나라는 주로 일본 중국 홍콩 미국 타이완 등이다. 이들 나라는 해마다 수십억 달러씩 들여 한국산 석유류를 사서 썼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들 수입국에서 한국 정유사에 덤핑 관세 판정을 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출혈 수출을 해왔다는 정유사들의 주장이 엄살이라는 사실은, 휘발유 제품의 국제 가격과 국내 정유사들이 해외에 파는 수출 가격을 비교하면 잘 드러난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휘발유 제품의 국제가(FOB)는 ℓ당 1백88.7원이었다. 같은 시기 국내 정유사들이 해외에 내다 판 휘발유 제품 가격은 1ℓ에 1백93.5원으로 국제가보다 오히려 더 높았다. 이를 보더라도 국내 정유사들이 잉여 석유류를 불가피하게 원가 이하로 해외에 내다 팔아 손해를 보고 있다는 주장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처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수출 물량이 국내에서 팔고 남은 잉여분이라는 정유사측의 주장도 사실과 거리가 있다. 대부분의 정유사는 수익 창출을 위해 내수보다 오히려 수출에 주력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정유사는 회사를 홍보하는 홈페이지에서도 이런 사실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수출 물량이 가장 많은 S-oil은 홈페이지의 ‘경영 전략’ 난에 이렇게 적고 있다. ‘수출을 통한 수익성 극대화를 위해 상업 가동 초기부터 내수 시장에서 탈피해 해외 시장 개척에 주력해 왔다. 그 결과 지금은 연간 생산 물량의 50%를 수출하고 있고, 1995년 이후 연간 20억 달러 이상을 꾸준히 수출하고 있다.’

결국 정유사들은 ‘공장도 가격보다 싼’ 값으로 수월하게 수출해 수입을 올리고 있으며,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공장도 가격보다 훨씬 비싼 값에 석유류를 팔아 이중으로 폭리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올해 들어 국내에 수입하는 석유류 가격에 비해 국내에서 정제되는 석유류가 훨씬 비싸 정유사들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지적이 일자 국내 정유사를 대표하는 대한석유협회는 ‘ 고정 비용’을 내세우며 단순 비교가 무리라고 반박해 왔다. 즉 국내에서 정제해 판매하는 석유류 가격에는 감가상각비 순발생 이자 등 연간 2조8천억원의 고정비를 반영했기 때문에 고정비가 포함되지 않은 수입 석유류보다 비쌀 수밖에 없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이번에 <시사저널>이 추적한 바에 따르면, 정유사들의 폭리 구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국내에서 생산된 모든 완제품 석유류 가격에는 고정비가 계상되어 있으며 이는 수출 가격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수출가가 공장도 세전 가격에 비해 터무니없이 싸다는 것은 국내 소비자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바가지를 써왔는지 알려준다.

대한석유협회의 한 관계자는 이처럼 석유류 수출 가격이 국내 공장도 세전 가격보다 싼 데 대해 관세 및 석유수입부과금 환급분과 저장 등에 소요되는 국내 비용이 제외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같은 해명이 정유사들이 담합해서 폭리를 취해오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을 해소해 주지는 않는다. 정유사의 해명을 전적으로 수용하더라도 석유류의 수출 가격과 국내 공장도 세전 가격이 왜 차이가 나는지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산업자원부는 석유 파동에 대비해 최고가(最高價)를 고시하기 위해 ‘석유제품 손실보전 기준’이라는 산정 방식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이 산식은 유류의 복합 원가를 산정하는 방식으로서 원유비·금융비·정제비·유전스 환차손을 포함해 모든 요소를 종합한 연동 산식으로 손실보전 기준을 설정한다. 이 산식을 적용하면 지난 1년 7개월 동안 휘발유 1ℓ당 국내 공장도 세전 가격과 수출가 사이의 최저 차액은 53.08원(1999년 4월)이었다. 같은 달에 관세 및 수입부과금 환급분, 국내 저장 비용 등은 약 51원을 차지하고 있다. 이 기간을 통틀어 월별로 살펴볼 경우, 정유사들은 휘발유 1ℓ당 국내 공장도 세전 가격에서 최소한 2원에서 최대 62원의 이익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석유류의 3분의 1을 덤핑 수출하고 있다는 정유업계의 주장은 그래서 어불성설이다.
결국 국내 정유사의 석유류 수출 가격은 결코 제품 원가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다. 이는 곧 수출 가격이 최소한 생산 원가 이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수출가보다 비싼 국내 공장도 세전 가격은 과도한 마진이 포함된 가격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소비자 가격에는 더 높은 마진이 붙어 있다.

이처럼 국내에서 유통되는 석유류 가격에 과도한 마진이 포함됨으로써 발생하는 국민적 손실은 실로 엄청나다. 우선 석유류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국내 산업체는 정유사의 폭리 구조에 고유가 영향까지 겹쳐 생산 원가가 증가해 국제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 또 군사·철도·항만 등 정부와 공공기관이 구입하는 유류가 턱없이 고가로 매겨져 국민 세금 부담으로 고스란히 전가되고 있다. 지난 9월 공정거래위원회가 국내 5대 정유사가 국방부에 항공유를 납품하며 폭리를 취했다는 사실을 적발해 무려 1천9백1억원을 과징금으로 부과했지만 이마저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유사들이 과도하게 마진을 올리다 보니 국민에게 세금 부담을 주는 외에도 국민의 일상 생활에 직접적인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한국전력·지역 난방공사·시내 버스 회사 등이 기름을 비싸게 구입한 것은 결국 전기 요금·난방비·버스 요금 등 석유류가 들어가는 공공 요금에 고스란히 전가되고 있다. 이밖에 천만명 이상의 운전자들이 휘발유를 비싸게 삼으로써 가계 지출 증가를 감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고유가 시대를 맞아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국민과 산업체의 고통 분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전기 한등 끄기, 목욕탕 휴일제 실시, 자동차 10부제 도입 등 에너지 절약형 소비 사회를 유도한다는 대책을 주로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유사가 결코 손해 보지 않는 수출 가격이 공장도 세전 가격보다 훨씬 싸다는 점이 드러난 이상 이를 덮어둔 채 국민에게만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유사가 폭리를 취한 부분만큼 석유류 가격을 내려야 마땅하다.

그러기 전에 정부는 석유류의 공장도 세전 가격에 정유사가 부당한 웃돈을 얼마나 얹었는지 밝혀내 정유사 간의 담합을 근본적으로 막아야 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과잉 도입한 원유를 석유공사가 운영하는 비축 기지에 저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재 국내 기지 원유 비축률은 58%에 머물러 있다. 정부는 정유사가 생산한 각종 석유류를 수출 가격으로 사서 석유 비축량을 늘리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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