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메달' DJ 품안에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0.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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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 뒤켠 냉소주의도 만만찮아… 남은 과제는 ‘성공한 대통령 되기’
멀리 노르웨이에서 날아온 낭보(朗報)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 100주년이 되는 해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타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노벨상은 한국과는 거리가 먼 상으로 여겨져 왔다. 한 독자는 전화를 걸어와 “김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다 헛소문인 줄만 알았다”라고 놀라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젠 한국도 당당히 노벨상 수상 국가 대열에 올랐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노벨상 수상자를 만들어낸 국민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 뉴욕에서 사진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한 교포는 “평소 한국 상인들을 무시하는 듯하던 뉴욕 경찰의 태도가 DJ의 노벨상 수상 발표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라면서,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한국이 고향이라는 얘기를 자랑스럽게 할 수 있다고 기뻐했다. 프랑스에 유학하는 한 여대생도 “한국을 아는 이유를 외국인들은 대부분 서울올림픽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노벨 평화상 때문에 한국을 기억하는 외국인이 많아질 것 같다”라고 좋아했다.

이렇듯 해외로부터 오는 반응이 더 뜨거운 것은 그만큼 노벨 평화상이 지니는 국제적 상징성이 크다는 의미다. 일본의 <요미우리 신분>은 호외까지 만들어 노벨 평화상 소식을 전했고, 10월21일 시작되는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기간에 김대통령에게 개별 면담을 요청한 나라도 처음 6개국에서 노벨상 발표후 14개국으로 늘어났다.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돈방석에 앉은 스웨덴 출신 과학자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을 받들어 1901년 제정되었다. 해마다 평화·의학·문학·경제학·화학·물리학 여섯 분야에 대해 시상하는데, 이 가운데서도 평화상은 최고의 영예로 인정받아 왔다. 지난 한 해 인류 평화에 최대로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이 상은 선정 기준이 엄격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하며, 수상자를 안 낸 해도 열여섯 번이나 된다.

역대 평화상 수상자에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1906년), 브란트 서독 총리(1971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1990년),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1993년) 등 정치인과 국제지뢰금지운동(1997년), 국경없는의사회(1999년) 같은 단체가 들어 있다.

수상의 의미가 큰 만큼 이 상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올해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 개인 1백15명과 단체 35개 등 모두 1백50명의 개인·단체가 경합했다. 후보 명단을 끝까지 함구하는 노벨위원회의 관행 때문에 전체 후보 명단은 베일에 가려 있지만, 개인 자격으로는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조지 미첼 전 상원의원,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전 총리, 마르티 아티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이, 단체로는 구세군과 국제인권감시단체인 ‘인권 워치’, 전범재판소 같은 유엔 기구, 코소보 사태 때 유고의 인종 청소를 피해 도망쳐온 알바니아계 난민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알바니아의 북부 도시 쿠케스 등이 포함되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발표한 노벨위원회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두 가지 선택이 있었으나 김대통령을 만장일치로 선택했다”라고 말했다. 외신들도 국제적 분쟁이나 갈등 해소와 평화 정착에 눈부신 활약을 한 개인을 선택할 것인지, 인도주의 활동을 해온 단체를 선택할 것인지를 놓고 심사위원들이 고심했다고 전해, 결국 김대통령과 인권단체가 막판에 경합한 것으로 보인다.

노벨위원회는 김대통령의 업적을 크게 세 가지로 꼽았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화,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사실 김대통령의 인생은 그 자체가 민주화와 인권 투쟁으로 일관된 한편의 드라마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인으로서 김대통령의 인생은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가 민주화 투사이자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변신한 것은 1971년 대선부터다. 당시 당내 경쟁자인 YS를 누르고 신민당 대선 후보로 나선 DJ는 마흔여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돌풍을 일으키며 박정희 대통령과 박빙의 승부를 벌였고, 94만표라는 근소한 표차로 패했다. 하지만 이 때부터 독재 정권의 집중적인 견제와 박해가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1971년 테러로 보이는 교통 사고로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고, 1972년 유신이 선포된 후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반독재 투쟁을 하던 그는 1973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잡혀 수장될 뻔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1970년대 말까지 그의 삶은 가택 연금과 구금의 연속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사면 복권되어 자유를 누린 것도 잠시, 신군부의 쿠데타로 다시 투옥된 그는 이듬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국제 여론 덕분에 감형되어 목숨을 건진 그는 미국으로 억지 망명길에 올랐고, 이 때부터 아시아 작은 나라의 반체제 인사에서 세계적인 인권운동가로 알려졌다. 1998년 2월 <뉴욕 타임스>는 김대통령을 ‘아시아의 만델라’로 비유했다. 독재 정권과 맞서온 DJ의 삶이 평생 인종 차별에 맞선 남아공 만델라의 삶과 비슷하다는 얘기다. 이 신문은 또 ‘독재 정권이 DJ를 죽이려 할 때마다 DJ는 하나씩 그의 전설을 만들어 갔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중반까지가 DJ가 인권 신장에 투신한 시기라면, 그 이후는 민주화에 열정을 쏟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85년 귀국한 그는 민추협 공동의장을 맡아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고, 두 번 낙선한 끝에 1997년 결국 50년 만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했다. 노벨위원회는 DJ가 대통령에 당선한 것 자체가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 대열에 진입하는 분기점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김대통령은 집권 이후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애썼다. 제주 4·3 특별법,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법 제정이나 민주노총과 전교조 합법화, 비전향 장기수 전원 석방이 대표적이다. 이번 노벨 평화상 발표장에서도 논란이 되었듯이 이 과정에서 DJ는 ‘노조에 강경하다’ ’인권법 제정에 소극적이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 정책의 기조는 그간의 신념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지난 9월 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재단이 김대통령에게 노벨 평화상의 예고편 격이 된 ‘라프토 인권상’(2000년)을 준 것은 바로 이런 그의 실천력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에 앞서 김대통령이 수상한 필라델피아 자유 메달(1999년), 유엔 인권협회 인권상(1998년),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의 유니온 메달(1994년), 미국 조지 미니 인권상(1987년) 등도 이 분야에 대한 그의 공헌을 평가하는 국제 공인 기록이다. 이런 전력이 노벨 평화상 수상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DJ가 이번에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된 결정적인 업적은 ‘한반도 긴장 완화’에 있다. 취임 이후 흔들림 없이 햇볕정책을 펴온 그는 지난 6월13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남북간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동시에, 반 세기 동안 적대 관계를 유지해온 북·미, 북·일 관계에도 놀랄 만한 변화를 주고 있다. 북한과 미국은 지난 10월12일 적대 관계 종식을 선언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고, 머지 않아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다. 북·일 관계 개선도 가파른 상승 기류를 타고 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으로 여겨진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DJ의 한 핵심 측근은 이번 노벨상 수상을 ‘끈질김의 승리’라고 말했다. 한번 목표를 세우면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끈질기게 공략해 결국 이루어내고야 마는 DJ식 인내의 결실이라는 얘기다. 그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모두 3전4기로 이루어냈고, 노벨상도 열네번 도전해 따냈다. 남북 화해 분위기는 1970년대 초부터 30년간 다듬어온 이론적 준비가 결국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하지만 요즘 국내 현실은 김대통령과 여권이 마냥 노벨상 수상을 기뻐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의약 분업에 따른 고통과 경제 위기, 동서 갈등이 겹쳐 적지 않은 국민들은 DJ의 노벨상 수상에 시큰둥하다. 게다가 영남 지역과 보수층 사이에는 ‘북한에 다 퍼주고 구걸한 상이 뭐 대단하냐’라는 극심한 냉소주의가 퍼져 있다. 한마디로 DJ가 노벨상을 의식해 내치(內治)는 제쳐 두고 외치(外治)에만 치중했다는 불신이 팽배하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김대통령과 여권은 상을 받고도 표정 관리를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김대통령은 교통 혼잡이 우려된다며 국립 묘지 참배를 포기했고, 쏟아지는 외신의 인터뷰 요청도 사양했다. 10월16일 ‘모든 공을 국민들에게 돌린다’는 담담한 내용의 기자회견만 했을 뿐이다. 노벨 평화상 발표 직후 청와대에서는 김대통령이 어려운 나라 사정을 고려해 12월10일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비공식 발표가 나왔다가 취소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김대통령은 노르웨이 국영 텔레비전과 가진 인터뷰에서 “정의는 당대에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역사 속에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신념으로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이 상을 받고 보니 현세에서 과분한 보상을 받은 것 같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의 말마따나 김대통령은 당대에 많은 것을 이루었다. 이제 김대통령에게는 정치와 경제를 복원하고 차가운 민심을 다독여 ‘안팎으로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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