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자 4백만명 시대’ 눈앞에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3.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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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사들 한도 축소로 폭증 예고… “2000~2001년 무분별 카드 발급의 부메랑”
‘연체 한 번 한적도 없는데 갑자기 우리카드와 현대카드에서 현금 서비스 한도가 제로가 되었다’(아이디 !!!). ‘이쪽 저쪽에서 한도가 막 떨어진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신불자(신용불량자) 대열에 들어가나 보다. 죽고 싶다’(귀신). 이른바 카드 돌려막기로 근근히 버텨오던 잠재적 신용불량자에게 한도 축소는 신용 폭탄이 터진 것과 같다.

‘안티엘지카드’라는 아이디를 가진 한 개인 사업자는 절대 LG카드 빚만은 갚지 않겠다며 냉소했다. 11월24일 오전까지 1천3백만원(현금서비스 5백만원)이던 이용 한도가 결제일을 이틀 앞둔 이날 오후 갑자기 3백만원(현금서비스 30만원)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에 빠진 이들에게 신용불량자 된 지 2년째라는 ‘선배’는 차라리 지금 신불자가 되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수십 개에 달한다는 신용불량자 커뮤니티나 금융감독원 등 인터넷 사이트에는 신용 막장 인생들이 분노를 삭이지 못하거나 자포자기하는 글로 도배되고 있다. 카드 돌려막기는 개그맨 출신 가수 서 희씨의 인기곡 <대한민국과 싸우지 마>에 등장할 정도로 일상화해 있다. 신용불량자 문제는 이미 최대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있다. 강·절도, 유괴, 납치 등 강력 범죄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가정 파탄과 해체를 불러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해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파장도 심각하다. 한창 일할 나이인 20∼30대가 신용 불량의 늪에 갇혀 노동 전선에서 배제되고 있다. 신용불량자와 카드사 위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카드사의 유동성 위기는 은행 등 다른 금융기관에 불똥이 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금융 시장의 최대 교란 요인이 되고 있다. 경기 회복이 최대 묘책이라지만, 소비할 수 없는 사람들이 폭증하고 있다는 것은 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다. 전국은행연합회에 따르면, 10월 말 현재 개인 신용불량자는 3백59만6천명에 달한다(도표 참조). 경제활동 인구(2천3백20만명) 100명당 15.5명꼴이다.

가만 놔두어도 신용불량자 4백만명 시대가 멀지 않은 터에 이를 앞당기는 돌발 변수까지 생겼다. 11월17일부터 현재화한 LG카드의 유동성 위기다. 이후 카드사들은 물론 할부금융사 은행들까지 경쟁적으로 후폭풍 차단에 나서고 있다. 이들의 차단 방법은 이른바 ‘디마케팅’. 카드를 여러 장 갖고 있거나 신용 상태가 좋지 않은 회원들의 이용 한도(대출)를 대폭 줄임으로써 카드 돌려막기를 원천 차단하고 불량 고객을 대거 솎아내는 것이다.

“내년 2~3월 신용 대란 일어날 수도”

카드사들이 추방하려는 고객은 4개 이상 카드를 갖고 있는 다중채무자들이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카드를 4개 이상 소지하고 있는 회원은 모두 9백88만명(연체 금액은 5조5천억원). 카드 업계는 이 가운데 10∼15% 가량(99만∼1백47만 명)이 돌려막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미 우리카드와 삼성카드 등 전업계 카드사와 일부 BC카드사들이 한도를 대폭 떨어뜨렸고 현대캐피탈과 삼성캐피탈도 대출 전용 카드의 한도를 대거 하향 조정했다. 국내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도 곧 30만∼50만 명을 대상으로 한도 축소를 단행한다. 금융 회사들은 잠재적 신용불량자들이 고객이 되면 연체율이 높아질 것으로 보여 이를 막기 위한 예방 조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거의 모든 금융 회사들이 동시다발적이고 경쟁적으로 한도를 축소함에 따라 ‘신용불량자 4백만명 시대’는 예상보다 훨씬 앞당겨질 것으로 보인다. 30만원 이상의 빚을 3개월 이상 연체한 이용자가 신용불량자로 등록되기 때문에 내년 2∼3월께 또다시 신용 대란이 촉발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것도 이런 정황에서다.

카드사들이 한도를 줄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지난해 4/4분기 이후부터 금감위의 경영개선명령을 피하기 위해 혹은 유동성 위기를 막기 위해 거의 매월 한도를 줄여왔다. 올 들어 10월 말까지 신용불량자가 무려 96만명이나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올 1/4분기에 신용불량자가 급증해 4월에 3백만명 시대를 열었던 것도 대부분의 카드사들이 지난해 4/4분기에 일제히 한도를 축소한 탓이었다. 9월 말 현재 8개 전업 카드사의 현금 서비스 한도는 58조9천억원으로 지난해 말의 1백1조원보다 41.7%(42조1천억원)나 줄었다.

신용불량자가 어떤 원인에 의해 폭증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 8월 한국개발연구원이 금융감독원의 용역을 받아 수행한 ‘신용불량자 증가의 원인 분석과 대응 방향’이라는 연구 보고서는 이에 대한 의미있는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 1997년까지만 해도 신용불량자 수는 1백50만명에서 1백60만명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돈을 받아야 할 채권자라면 모를까, 아무도 신용불량자 문제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97년 경제 위기에 따른 극심한 경기 침체와 고용 구조 변화로 말미암아 1998년과 1999년 신용불량자 수가 2백20만∼2백40만 명 선으로 크게 늘어났다. 신용불량자 추이의 제1 국면에 해당하는 ‘증가기’였다. 경제 위기 직후부터 비정규직 노동자가 크게 늘면서 이들이 빚을 제때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소득이 불안정해진 것이다. 청년 실업률 상승은 20대 신용불량자를 대거 양산해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백20만∼2백40만명이라는 신용 불량자 규모는 제2 국면인 1999년과 2000년 별 변동 없이 안정세를 보였다. 경기가 눈에 띄게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고용 구조가 고착화해 전반적으로 개인의 신용 위험이 높아진 탓이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제3 국면에 해당하는 2002년 이후 신용불량자 폭증 원인이다. 연구를 총괄한 신인석 연구위원은 특히 2002년 3/4분기 이후 신용불량자가 폭증한 까닭은, 신용카드 회사가 무자격자에게 무분별하게 카드를 발급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2000년과 2001년의 카드 발급 증가율은 각각 전년에 비해 무려 48%와 54%를 기록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그 결과 두 해 동안 카드사들은 순익 3조5천억원이라는 달콤함을 맛보았지만, 2003년 그것은 유동성 위기라는 혹독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공신력 있는 연구기관에 의해 확인되었을 따름이지, 무분별한 카드 발급과 정부의 ‘냉온탕식’ 카드 규제가 오늘날 신용불량자를 양산해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1999년 5월 정부가 현금 서비스 한도(월 70만원) 규제를 폐지하면서 신용카드 회사는 경쟁적으로 덩지를 불렸다. 특히 LG와 삼성이라는 두 재벌계 카드사의 선두 경쟁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 같았다. 두 카드사의 일등 경쟁에다 은행계 카드사까지 가세하다 보니 발급 기준 자체가 무의미해졌고, 급기야 신용불량자로 등재되어 있지만 않으면 카드가 발급될 지경이었다. 다른 회사의 카드를 소지하고 있으면 더 적극적으로 발급에 나섰다고 하니 카드사 스스로 돌려막기를 부추긴 셈이다.

정부·카드사 아무도 책임 안져

카드 부적격자들의 잠재부실이 이미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때인 지난해 6월 정부는 뒤늦게 건전성 규제라는 칼을 빼들었다. 이것은 신용불량 폭탄의 뇌관으로 작용했다. 카드사들은 규제를 피하기 위해 한도를 줄이고 또 줄였다. 그 결과 돌려막기로 연명해오던 잠재 신용불량자들이 대거 수면 위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책임은 카드사·이용자·정부라는 세 축에 모두 물을 수밖에 없다. 자기 신용은 자기가 관리해야 한다는 원칙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근간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에게 카드사나 정부가 돌팔매질을 할 수 있을까. 이용자의 도덕적 해이를 탓하기 이전에 야박할 정도로 신용을 따져야 할 카드사들은 최소한의 책무조차 이행하지 않았고, 정부 역시 이들을 감독하는 데 태만했으며 규제의 일관성도 없었다. 이들의 직무 유기가 또다시 신용 대란을 불러올 참인데 책임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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