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빛 올가미에 걸린 ''대한민국 부통령''
  • 김종민 기자 ()
  • 승인 2000.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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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장관, 대출 종용 의혹 갈수록 커져… 결정적 증거는 없어
“이제 권력형 비리는 없어졌다.” 지난 8월 28일 8·7 개각 이후 처음 열린 사회관계 장관 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있게 한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빛은행 불법 대출 사건을 둘러싸고 권력형 비리 의혹이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아크월드 불법 대출 사건에 DJ 정권의 실세 중의 실세인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이 개입했는가 여부.

박지원 장관이 어떤 인물인가. 한나라당에서는 박장관을 가리켜 ‘DJ의 수족이 아니라 내장’이라고까지 했다. 정권 출범 이후 줄곧 청와대 공보수석과 문화관광부장관 등 현직을 놓치지 않으면서 막전(幕前) 실세로 힘을 발휘해 온 것은 그 단적인 예. 특히 박장관이 남북 정상회담 밀사로 활약한 사실은 그에 대한 DJ의 절대적 신임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예이다.

힘이 붙으면 말도 많아지기 마련. 각종 인사와 이권 그리고 정책 결정과 관련된 시중의 유언비어에는 박장관의 이름이 단골처럼 등장하곤 했다.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있을 때는 각 언론사의 간부 인사에까지 개입했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모든 길은 박장관으로 통한다’는 속설까지 생겨났다.
DJ 정권에서 차지하는 박장관의 비중을 감안할 때 만일 그가 이번 불법 대출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의약분업, 현대 사태, 윤철상 파동 등 악재에 지칠 대로 지친 DJ 정권의 도덕성과 권위는 곤두박질할 수밖에 없다. 특히 IMF 극복을 내걸고 출범한 DJ 정부의 핵심 실세에 의해 IMF의 주원인이었던 권력형 대출 비리가 저질러졌다면, 국민들이 느낄 배신감은 극도에 달할 것이 뻔하다.

일단 현재까지 박장관이 개입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다. 검찰에서도 이번 사건을 박혜룡 아크월드 사장과 신창섭 한빛은행 관악지점장이 공모한 ‘금융 사기극’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박장관과 이번 사건을 연결시킬 만한 의혹들이 계속해서 불거져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박장관과 아크월드 박혜룡·현룡 씨 형제와의 관계. 항간에는 박장관이 형편이 어려웠던 성장기에 박씨 형제의 부친이자 진도의 유지인 박귀수씨(9대 의원·한때 가방공장 운영)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심지어는 박씨 형제의 어머니를 수양 어머니로 불렀다는 얘기까지 나돌고 있다. 물론 박장관은 두 사람은 굳이 촌수로 따지자면 35촌쯤이고, 혜룡씨는 알지도 못한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박장관은 1996년 박귀수씨 장례 때 문상한 적이 있다. 특히 정권 교체 이후 박혜룡씨 동생 현룡씨를 정권인수위에 추천했을 뿐만 아니라 청와대 공보수석 보좌관으로 데리고 있었다. 현룡씨가 영어를 잘해서라고 설명하지만, 미국에서 금융재정 분야를 전공한 현룡씨를 공보수석실에서 일하게 한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보좌관은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까운 인물을 임명하는 것이 상식이어서 박장관이 현룡씨와 ‘특별한 사이’ 아니었겠느냐는 의혹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박장관이 신용보증기금 영동지점에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도 명쾌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 박장관은 ‘명색이 청와대 수석이 일개 지점장에게 청탁 전화를 했겠느냐’고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주장이지만, 이 주장도 최근 이수길 한빛은행 부행장에 의해 박장관이 한빛은행 자회사의 ‘일개’ 계약직 사원에 대한 인사 청탁까지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빛이 바랬다. 또한 이운영 지점장에게 전화 건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박장관이 지난 5월6일과 8월30일, 31일 세 번에 걸쳐 범죄 혐의로 수배된 이씨의 메신저를 만난 점도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당시 신용보증기금 영동지점장 이운영씨에 대한 사직동팀의 내사도 의혹거리다. 사직동팀은 비리가 제보되어 내사에 나섰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당시 영동지점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사직동팀 내사가 진행될 당시 이지점장이 아크월드 건으로 괘씸죄에 걸렸다는 얘기가 돌았다”라고 전했다. 이씨가 ‘커미션을 잘 챙기는 자판기’였다는 사직동팀의 주장에 대해서도 당시 영동지점의 한 간부는 “그 얘기는 과장된 얘기이다”라고 부인했고, 다른 직원 역시 “이씨가 개인 재산이 많아 다른 지점장에 비해 커미션을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밝혔다. 한 직원은 “사직동팀이 일정 액수 이상의 보증 건에 대해 저인망식으로 조사했고, 내사 후에는 영동지점의 팀장급 간부 전원이 다른 지점으로 전보 발령이 났다”라며 사직동팀의 내사가 개인 비리 차원의 조사라고 보기에는 ‘매우 특별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수길 한빛은행 부행장이 등장한 것 역시 외압 의혹을 더하고 있다. 이부행장은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의 사촌 동생으로 현정부 출범 이후 금융계의 신실세로 떠오른 인물. 한빛은행 관악지점장 신창섭씨는 지난 1월과 8월 두 차례 이부행장이 아크월드를 도와주라고 지시해 불법 대출을 계속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에서 신씨와 대질 신문을 한 이부행장은 8월에 신씨와 통화했지만 아크월드를 도와주라고 지시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부행장이 지난 5∼6월께 박장관과 세 차례 전화 통화를 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의혹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박장관은 이부행장과의 전화 통화에서 소소한 인사 청탁을 했다는 것인데, 이 정도 사이라면 박장관과 이부행장 사이에 아크월드와 관련된 얘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박혜룡씨가 이부행장을 찾아가 박장관의 조카라고 밝히면서 대출을 부탁했는데 이부행장이 이를 ‘가까운 사이’인 박장관에게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의혹은 말끔히 풀리지 않고 있지만 일단 검찰은 박장관과 이부행장의 진술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그러나 검찰이 외압설이 사실 무근이라고 결론을 내리더라도 그 여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야당에서는 이미 ‘권력형 비리 조사특별위원회’(위원장 현경대)를 구성해 이번 한빛은행 건을 비롯해 DJ 정부 출범 이후 벌어졌던 모든 권력형 비리를 파헤치겠다고 나섰다. 특히 이번 사건을 ‘한빛 게이트’에서 ‘박지원 게이트’로 개명한 한나라당은, DJ 정권의 권력형 부패를 밝힐 최고의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하고 박장관에 대한 각종 의혹을 집중적으로 물고늘어질 태세다. 박장관 개인과 관련된 각종 소문을 뿌리부터 다시 캐는가 하면, 국정 감사 준비를 하고 있는 문화관광위 소속 의원들도 박장관의 비리를 정조준하고 있다.

여론도 심상치 않다. 더구나 정권 교체 이후 각종 이권과 인사에서 호남 출신들이 독식하고 있다는 여론이 사회 저변에 적지 않게 퍼져 왔다. 주식 시장과 건설 공사 수주에 권력 핵심 인사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말도 떠다녔다. 지난해에는 로비 성립 여부도 분명치 않았던 옷로비 사건이 정국을 뒤흔들었지만, 이번 사건은 천억 원이라는 거액이 일개 중소기업에 불법 대출된 것이어서 실체가 분명하다.

만일 이번 한빛은행 불법 대출 사건과 관련해서 정부·여당이 국민 여론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현정권의 권위와 도덕성은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 여파로 그동안 설로만 나돌던 각종 권력형 비리에 대한 항의와 추궁이 꼬리를 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자연히 여권 내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여권의 한 인사는 그동안 권력 실세들과 관련된 안 좋은 소문이 너무 많이 돌았다면서, 이번 사건이 권력 내부의 긴장감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권 핵심부는 여전히 박장관 등의 외압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심지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박장관 외압설이 사실 무근으로 밝혀진다면 오히려 박장관에 대한 그동안의 온갖 오해와 뜬소문을 일소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기대를 품기도 했다.

역시 열쇠는 DJ가 쥐고 있다. 여권의 한 인사는 “지난해 김태정씨를 법무장관에 임명한 것이 DJ 집권후 처음이자 마지막 판단 착오였다”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마지막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DJ의 판단력은 이번 한빛은행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번 시험대 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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