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열려도 ‘칼춤’ 추는 보안법
  • 권은중 기자 (jungk@sisapress.com)
  • 승인 2000.05.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경환ㆍ심재춘 씨 중형ㆍㆍㆍ“간첩 돕지 않았다” 항소 인권실천시민연대 “법 형평 무너졌다”비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았지만 북측과 통신·회합을 금지하는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지난 4월21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으로 기소된 전 <말>지 기자 김경환씨(36)와 심재춘씨(30) 항소심 공판이 서울고법에서 열렸다. 이들은 1998년 12월 군의 여수 대간첩작전 때 사망한 북한 공작원 진운방이 국내에서 활동할 때 편의를 제공한 혐의로 1심에서 각각 징역 4년 6개월과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언도받았으나 항소했다.

이들은 항소이유서에서 진운방에게 편의를 제공한 점은 인정하나 중형 구형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편의 제공 혐의로 1년 형, 진을 만나 민혁당 전신 반제청년동맹 기관지 <주체기치 9호>를 건네 국가 기밀을 누설한 혐의로 3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문제가 된 <주체기치 9호>에 실린 내용은 한·미 방위 분담 실태, 미국의 대외 무기 판매액, 한국의 걸프전 지원금 등 이미 신문에 보도된 것이 대부분이어서 국가 기밀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책자에 인용된 논문을 쓴 정일용 교수(외국어대·무역학)도 자신이 쓴 글을 국가 기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견서를 법정에 제출했다.

김씨는 항소이유서에서 ‘전향했지만 진운방을 인간적으로 신고할 수는 없었고, 이에 대한 죄는 달게 받겠지만 <주체기치>를 건넸다는 이유로 3년6개월 형을 구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건낸 <주체기치>는 민혁당 핵심 인물의 한 사람이었던 박 아무개씨(36·변호사)가 편집을 맡아 제작한 것인데, 박씨는 자수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김씨의 변론을 맡은 정태상 변호사는 박씨를 항소심 증인으로 신청했다.
김영환씨 “내가 책 전달 지시했다”

<강철서신> 저자이자 민혁당 핵심 인물로 구속되었다가 공소 보류로 풀려난 김영환씨(37)는 <주체기치> 내용과 전달 과정을 증언하려고 했으나 법원에서 증인은 박씨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며 거부해 증언을 하지 못하고 있다. 김영환씨는 “내가 김경환씨에게 진운방을 만나 <주체기치>를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우리는 국가 기밀에 접근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책자를 전달하려고 했던 까닭은 우리 생각과 노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밝혔다.

대학 강사였던 심재춘씨는 선배로부터 도피 중인 노동운동가라고 소개받은 진운방에게 숙소와 차량을 제공했다가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의 중형을 받았다. 심씨는 진운방이 무전기를 찾기 위해 여수에 갔을 때 동행했고 돌산대교 검문소 등을 촬영할 때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렸다. 심씨는 자기에게 진을 소개한 민혁당 핵심 인물인 하영옥씨(37)가 법정에서 관련 증언을 거부하고 있어 간첩 혐의를 벗지 못하고 있다.

심씨는 항소이유서에서 ‘1998년 진운방에게 자신의 차로 여수에 내려가는 편의를 제공했으나 북으로 가는 퇴로 정찰과 기밀 탐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심씨는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여수 향일암 군부대 초소는 차량에서 육안으로도 볼 수 없을 만큼 멀리 있었고, 촬영을 위해 차를 멈추거나 서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심씨는 결혼 2개월 만에 체포되어 주변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가족 역시 이런 혐의로 김씨와 심씨에게 중형이 선고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민혁당의 주역으로 1991년 입북해서 김일성 주석과 만나 훈장까지 받은 김영환씨와 조유식씨가 반성문을 쓰고 공소 보류로 풀려난 것과 비교하면 형평성에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김경환씨의 아내 이경희씨(35)는 “국정원 조사 때 영남위 활동가를 한 사람 소개해 달라고 했으나 남편이 거절했는데 이 때문에 보복받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주범은 석방하고 연락책인 종범들에게 중형을 구형한 것은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적용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라며 국보법의 폐해를 지적했다. 국보법은 지난 15대 국회에서 개정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한나라당의 강력한 반대로 본회의에 제출되지 못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