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여야 ''공천 독재''에 분노하는 ''표심''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0.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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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 배반한 여야 ‘공천 독재’에 시민 분노 폭발
잔치는 끝났다. 공천 개혁을 하겠다던 여야의 공언(公言)은 뚜껑이 열리자마자 공언(空言)으로 드러났다. 국민들은 그 동안 여야의 공천 내용에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대폭 물갈이설이 언론 지면을 장식했고, 각당 수뇌부도 암묵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이를 확인했다. 국민들은 낙천 운동의 위력을 믿을 뻔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민주당의 공천 개혁 약속은 ‘절반의 개혁’으로 끝났다. 수도권에서는 개혁 성향의 386 세대를 집중 배치하는 등 국민들의 변화 욕구에 어느 정도 호응했으나, 호남 공천은 철저히 충성도 위주로 짰다. 소수 실세들이 공천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제 사람 심기에 바빴다. 미리 천명했던 공천 기준은 내팽개쳐졌다. 386 세대의 진출을 빼면 수도권도 신진 인사들의 진입 장벽은 높았다. 공천에서 탈락한 수도권의 한 40대 인사는 “386 세대를 공천한 것도 당의 개혁 노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성을 고려한 선정주의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했다. 민주당의 공천 전횡은 절반의 개혁마저 순도를 의심스럽게 만들고 있다. 민주당은 총선시민연대의 낙천 대상 의원 18명 중 8명을 공천했다.

한나라당은 공천을 철저하게 이회창 총재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 데 활용했다. 공천 전 약속대로 공천 ‘혁명’은 일어났으나, 충격의 크기에 비례하는 개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총재의 대권 가도에 걸림돌이 될 중진들만 우수수 걸러냈을 뿐, 텃밭인 영남 물갈이는 20%대에 머물렀다. 총선시민연대가 지목한 낙천 대상 의원 32명 중 16명이 공천되었다.

자민련이야 시민단체들의 낙천 명단을 참조하지 않겠다고 미리 못박았으니, 재론할 여지조차 없다.

공천 작업이 끝나자 여야는 내부 반발로 몸살을 겪고 있다. 민주당 공천 탈락자들은 무소속으로 심판을 받겠다고 나서고 있다. 한나라당은 아예 당이 깨질 조짐조차 보이고 있다. 여야는 현재 내부 파열음을 진화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지만, 이미 끝난 공천을 번복할 수는 없다고 버티고 있다. 민주당 이재정 정책위의장이 2월21일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경우 민주적 정당이라면 당연히 공천심사위에서 재심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곧이어 정동영 대변인은 “더 이상 재심은 없다”라는 말로 논란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한나라당도 ‘이총재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대응할 것’이라면서 공천 번복은 없을 것임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야 지도부의 이런 대응조차 당 내부의 낙천자들을 향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공천을 다시 하라는 시민단체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아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정치인들, 이제 너희는 남이다”

이런 정치권의 이전투구에 대해 시민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총선시민연대가 개설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연일 분노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올라오고 있다. ‘백오(白烏)’라는 아이디를 가진 한 시민은 ‘정치인들, 이제 너희는 남이다’라고 분노했다. 2월21일 오후까지 총선시민연대 사이트에 낙선운동 지지 서명을 남긴 시민 수는 2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총선시민연대 장 원 대변인은 “정치권이 스스로 정치 개혁을 이루는 것은 마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것처럼 어려운 일임을 새삼 절감한다”라면서 공천 철회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여 가겠다고 밝혔다. 총선시민연대는 2월19일 전국 40개 지역에서 ‘국민 참정권 회복, 부패 정치인 추방 범국민대회’를 연 데 이어 21일에는 공천을 받은 낙천 대상자 40명에 대한 공천 철회를 여야에 공식으로 요구했다(명단은 박스기사 참조).


총선시민연대는 또한 이들을 상대로 공천 무효 확인 소송을 내기로 했다. 박원순 상임집행위원장은 소송의 법적 근거가 헌법이 보장한 선거권과 민주적 공천 절차 등을 규정한 정당법 31조 침해라면서, 원고는 지역구 당원뿐 아니라 광범한 일반 유권자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위원장은 2월16일 검찰 출두에 앞서 밝힌 성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지지만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며, 유권자의 높은 수준과 의식만이 이 거대한 벽에 작은 구멍이라도 낼 원천입니다. 저희는 국민의 힘을 믿습니다.”

이제 국면은 정치권과 국민의 정면 대결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잔치는 끝났고, 국민들의 심판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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