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 러시아 대통령 전격 사임 배경
  • 모스크바·이건욱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0.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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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당선 도우려 장고 끝 결단…퇴임 후 안전 보장도 겨냥
20세기 마지막 날이었던 1999년 12월31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임기를 7개월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갑작스레 사임을 발표했다. 이 날 12시 옐친 대통령은 국영 방송인 ORT에 나와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새로운 정치인에게 길을 터 주기 위해 사임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헌법에 명시된 대로 90일 이내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일이 3월26일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옐친 대통령이 전격 사임함에 따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올해 6월에서 3월로 앞당겨진 대통령 선거일까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다.

그동안 건강과 가족의 비리 문제로 사임 압력을 받던 옐친은 집권 말기에 접어들수록 퇴임 후 자신의 안전에 대해 무척 불안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옐친의 공식 후계자인 푸틴은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인데, 무명에 가까웠던 그가 국정 운영을 떠맡게 된 이후 옐친은 거의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체첸에 대한 군사 작전 초기에는 옐친의 모습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만약 군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비난의 화살을 푸틴에게 돌리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체첸에 대한 군사 작전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고, 이에 고무된 옐친은 여론을 등에 업고 체첸에 대한 러시아군의 비인도적인 처사를 비난하는 서방 세력에 강력하게 대응했다. 여세를 몰아 곧 폭동 등으로 권좌에서 쫓겨날 것 같던 상황을 일거에 뒤집으며 지난 12월19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친(親)크렘린측이 승리하는 성과까지 거두었다.

3월에 대선 치르면 푸틴 당선 확실

하지만 만약 예정대로 6월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면 푸틴의 당선을 장담할 수 없었다. 루블화가 안정을 보이고는 있지만 실제로 국민의 삶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체첸과의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어 만약 올 봄까지도 별다른 군사적 성과가 없다면 푸틴의 인기가 급락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3월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 퇴임 후 옐친의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줄 푸틴이 당선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적인 유리 루슈코프 모스크바 시장이나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 총리 등은 그동안 언론의 줄기찬 ‘죽이기’에 시달려 당분간 기세를 떨치기가 힘든 처지이다. 겐나디 쥬가노프 러시아 공산당 대표와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야블로코당 당수는 진작부터 푸틴과 상대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물론 프리마코프가 이끄는 러시아-조국당과 러시아 공산당이 연합한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선거가 90일 앞으로 다가온 지금으로서는 푸틴을 이기기가 불가능한 형편이다. 이번 옐친의 돌연한 사임은 확실히 시의 적절했다.

평소 옐친이 좌충우돌 타입이라고 알고 있던 러시아 국민이나 전세계인은 이번 옐친의 결단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옐친의 무모한 듯이 보이는 행동에는 철저한 계산이 숨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번 결정도 돌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옐친 대통령의 부인인 나이나 여사에 의하면 1주일 정도 장고한 끝에 결정한 일이라고 한다.

한편 기존 정치 세력은 겉으로는 옐친의 결단을 칭송하며 환영 일색이지만, 상당히 당황한 눈치이다. 러시아의 라디오 채널 중 하나인 에코 모스크바는 지난해 12월31일 전화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청취자 대부분이 옐친의 사임에 대해 ‘기쁘다’고 답했다. 밀레니엄을 맞이하느라 밤을 새워 즐기던 모스크바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옐친을 위해 건배하기도 했다.

물론 대통령이 바뀐다고 러시아의 상황이 당장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러시아 국민들이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처지에서 볼 때, 90년대를 풍미했던 대통령이 권좌를 포기한 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새로운 시대가 가져다준 큰 선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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