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통령 ‘JP 편들기’에 숨은 뜻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1999.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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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승리·내각제 담판·이원집정부제 위한 ‘고도의 노림수’
임명은 DJ가, 경질은 JP가! 요즘 국민회의 주변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가 어느 때보다 확실한 공조 체제를 보여주고 있다는 자조 섞인 비아냥이 나온다. 김대통령이 임명한 주요 인사들이 김총리의 ‘몽니’ 한방에 파리 목숨이 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국민의 정부에서 김총리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가고 있다. 김총리가 자기 사람은 철벽같이 보호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국민회의 인사들은 여지없이 물러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회의 첫 희생자는 김원길 전 정책위의장이었다. 그는 지난 3월 국민연금 확대 실시에 대한 국민의 반발이 심하자 이를 ‘총선 후로 연기하자’고 김총리와 다른 목소리를 냈다가 팽(烹)당했다. 이는 당시 김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경질 의사까지 비쳤던 김모임 보건복지부장관이 김총리의 비호를 받아 건재했던 것이나, 한·일 어업협정 문제로 정부를 구석에 몰아넣었던 정상천 해양수산부장관 역시 자민련 몫 장관이라는 이유로 김대통령 권한 밖에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두 번째 희생자는 설 훈 전 기조위원장. 그는 지난 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임기 말 내각제 개헌이 불가피하다’고 내각제 연기론을 폈다가 김총리와 자민련의 반발로 교체되었다. 최장집 전 대통령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도 김총리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전격 경질된 사례로 꼽힌다. 최위원장은 6·25관과 내각제 해법을 두고 김총리와 한바탕 신경전을 벌인 적이 있다.

넓게 보면 김태정 전 법무부장관이나 손 숙 전 환경부장관 경질에도 자민련이 가세한 측면이 크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급기야 국민회의의 2인자 격인 김영배 총재권한대행이 김총리의 사퇴 압력에 밀려 결국 낙마했다.

이번 김대행 경질은 특히 김대통령이 자신의 유임 결정을 불과 5시간 만에 뒤집는 모양새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대통령은 통치권자로서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김대통령이 치명상을 감수하면서까지 김총리 편을 들고 나서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무엇보다 자민련과의 공조가 중요하다는 김대통령의 절박감 때문이다. 물론 김대통령은 과거에도 여·여 공조를 강조해 왔다. 김대통령은 지난 6월24일 국민회의 원외 지구당위원장과 당직자 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자민련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여기에는 자민련과 갈라서면 국민의 정부 자체가 무너진다는 위기 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위기 의식은 옷 로비 사건과 특검제 정국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된 듯하다. 여권 한 핵심 인사는 “대통령이 국민의 정부 최대 위기라고 할 수 있는 민심 이반 상황을 겪으면서, 자민련과 공조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절감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과거 어느 때보다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릴 것으로 예상되는 내년 총선에서는 자민련과의 공조가 더욱 절실하다는 것이 청와대 판단이다.

두 번째는, 내각제 담판을 앞둔 JP 달래기 차원이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김대행을 경질한 것은 김대통령이 김총리와 불필요한 갈등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 의도를 분명히했다. 8월 말로 예정된 내각제 담판을 위해 최대한 김총리를 예우하겠다는 의미다. 그는 이런 김대통령의 양보에 대해 또 다른 포석일 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이번에 김대통령이 양보했으니 내각제 문제에서는 김총리가 양보하라는 뜻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이원집정부제로 가려는 김대통령의 의도가 깔려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김총리에게 총리 권한이 상당히 확대되는 이원집정부제의 맛을 미리 보여준 뒤 그로 하여금 내각제 대신 이원집정부제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노림수 아니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대통령은 지난 6월 초 ‘JP 권력 강화론’이 담긴 보고서를 받고 이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치와 행정의 전면에 김총리를 내세우고 김대통령은 외교·안보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인지 최근 김총리의 권한은 상당히 확대되었다.

국민회의·자민련 ‘내각제 전면전’ 임박

이 때문에 자민련 일각에서는 마냥 좋아해서는 안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김대통령이 너무 내주는 것이 뭔가 불안하다는 것이다. 한 고위 당직자는 “이번 사건은 곧 닥쳐올 내각제의 전초전 성격이 짙다. 김총리는 이미 김대통령에게 한수 빚진 셈이다”라고 말했다.

갈수록 높아지는 김총리의 위세에 대한 국민회의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김대행 경질 직후 소집된 국민회의 고위 당직자 회의에서는 이런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안동선 지도위의장은 “총리의 대갈일성으로 집권당 총재권한대행 목이 날아갈 정도면 우리 당도 자존심이 있다”라면서 참았던 불만을 쏟아냈다. 여기에는 ‘자민련은 책임은 없고 권리만 누리는 집단’이라는 국민회의의 누적된 불만이 응축되어 있다. 국민회의 한 고위 인사는 김 전대행의 반발도 김총리와 자민련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성격이 짙다고 말한다. 김대행이 그동안 명색이 공동 정권이면서 서상목 의원 체포 동의안 부결, 국민연금 파동 등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사안까지 모두 국민회의에 떠넘기는 자민련의 행태에 불만이 많았다는 것이다.

극단까지 치달았던 국민회의 대 자민련의 감정 싸움은 국민회의에 새 당직자들이 포진하고, 김총리가 더 이상 국민회의를 자극하지 않는 쪽으로 자민련을 단속하면서 일단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내각제 정국을 목전에 두고 양 진영에는 ‘손 대면 톡하고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어느 쪽에서든 내각제 얘기가 나오는 순간 양측은 전면전을 벌일 태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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