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 반도체 포기 결정 막후 스토리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9.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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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그룹 전격 ‘포기’ 결정 어떻게 나왔나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언제, 어떤 생각으로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기로 결심했을까. 구회장의 순수한 결단이라는 LG그룹측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 내막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구회장은 1월6일 김대중 대통령과 30분간 짧게 면담한 후 포기 의사를 밝혔다.

이 날 회동 직전까지만 해도 구회장은 반도체를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일부 언론의 관측과는 달리, 구회장은 청와대 회동 전인 4일과 5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만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LG반도체 구본준 사장을 포함해 구회장의 최측근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 가능성을 일축했던 것도 이런 정황과 관련이 깊다. 이 때문에 시중에서는 김대통령이 구회장에게 사실상 협박에 가까운 발언을 했거나, 반대 급부에 대한 언질을 주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그러나 김대통령과 구회장의 회동 내용이 알려지면서, 이같은 추론은 점차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다. 그보다는 김대통령 특유의 ‘무릎을 맞대고 허심 탄회하게 이야기하는’ 해법이 효과를 거두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해지고 있다.

LG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구회장은 김대통령과 만나 두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LG반도체와 현대전자 두 회사가 연구개발 법인을 공동으로 설립해 기술을 공유하되, 다른 분야는 당분간 별도로 운영하는 방안. 이는 두 회사가 실제로 검토하고 있었던 대안이었다. 물론 구회장은 “국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면 대승적으로 포기할 수도 있다”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발언의 무게는 당연히 현재 진행중인 협상안에 쏠렸고, 포기할 수도 있다는 표현은 하나의 대안이라기보다는 빅딜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한 사족에 지나지 않았다.

“구회장, 날 좀 도와주소!”

그러나 구회장은 여기서 허를 찔리고 말았다. 김대통령이 전혀 예기치 않은 반응을 보인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라 조금씩 뉘앙스는 다르지만, 김대통령은 ‘빅딜을 제대로 성사시키기 위해서, 기왕이면 지분을 다 파는 게 어떻겠느냐’는 요지의 말을 했다. 애지중지하던 사업을 포기해야 하는 애끊는 심정을 달래기 위해 간곡한 한마디도 곁들였다. “구회장, 날 좀 도와주소!”

구회장으로서는 그동안 간접으로만 전해 듣던 대통령의 빅딜 의지를 직접 확인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구회장은 이 회동 전부터 엄청난 유무언의 압력을 실감하고 있었다. 지난해 12월28일 ADL사의 평가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채권 금융단으로부터 금융 제재를 통보받았다. 비록 정부는 빅딜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LG그룹에 대한 시선이 나날이 험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예를 들어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은 구회장이 현대 정몽헌 회장을 만나고 있던 시간, <시사저널>과 인터뷰하면서 LG그룹에 대해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평가기관 선정을 포함해 빅딜과 관련한 사안을 모두 합의해 놓고, 이를 뒤집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것말고도 청와대측의 불만은 있었다. LG가 여론을 자기에게 동정적으로 몰아가기 위해 로비와 언론 이용하기를 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정부의 구조 조정 노력 전체가 불신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LG그룹은 별 수 없이 구조 조정의 ‘최대 걸림돌’로 낙인 찍혀 버린 셈이었다. LG그룹은 청와대 기류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청와대 회동을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마당에 빅딜을 당초 구상대로 성사시키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것이라면? 구회장으로서는 순간적으로 입장을 바꾸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청와대 회동 결과가 알려지자, 지난해 9월 반도체 부문 빅딜에 합의한 후 여러 대안들을 검토해 왔던 LG 구조조정본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총수의 예기치 않은 결심을 뒷받침할 전략, 즉 이왕 반도체 사업을 넘기기로 했다면 값을 가장 후하게 받아내는 방안이 필요했다. 이미 양보를 한 마당에 값을 높게 부르면 설령 협상이 잘못되더라도 그 책임은 현대에 돌아갈 것이라는 점에서도 포기 이후 전략이 더욱 중요했다.

다행히 값을 높게 부를 명분은 있었다. 현대는 그동안 빅딜의 당위성을 홍보하기 위해 반도체 산업의 빅딜로 얻을 것이 굉장히 많다고 얘기해 왔다. 두 회사가 합칠 경우 시너지 효과(상승 효과)가 앞으로 5년간 약 62억 달러(약 7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내놓은 적도 있다. 6일 구회장의 청와대 회동 후 LG구조조정본부 강유식 사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한 다음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5년간 예상되는 62억 달러의 시너지 효과 중 상당 부분을 프리미엄으로 요구하겠다.”

현재 LG반도체 지분 가운데 LG그룹의 보유분은 약 60%에 해당하는 9천2백만주. 현 시세로 1조5천억원에 달한다. 여기에다 시너지 효과와 영업권과 같은 무형의 자산 가치를 반영하면 상당한 프리미엄이 붙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LG와 현대그룹 양측은 빅딜 과정에서 LG반도체 실사 작업을 벌였던 ADL사와는 다른 평가기관을 선정해, 평가 결과를 토대로 주식 매매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한 고비를 더 넘었을 뿐 빅딜 협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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