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한그룹 워크아웃, 연쇄 부도 전주곡인가
  • 張榮熙 기자 ()
  • 승인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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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벌·차입 경영으로 화 자초… 제2, 제3 새한 나올 수도
재계 서열 29위 기업 집단인 새한그룹이 침몰했다. 5월19일 주력사인 (주)새한과 새한미디어의 워크아웃(기업 개선 작업) 신청을 채권 금융기관이 받아들여 오너 일가의 퇴진은 물론 그룹 해체에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이미 이영자 회장(창업자인 고 이창희 회장의 부인)과 이재관 부회장(장남) 등 오너 일가의 주식 포기 각서가 채권단에 제출되었다. 특히 (주)새한의 최대 주주(16.15%)인 이부회장은 재산 처분 위임장과 경영권 포기 각서까지 써냄으로써 새한에 대한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올해 들어 자금 악화설과 오너 일가에 대한 세무조사설에 시달려온 새한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5월16일 12개 계열사 가운데 9개 사를 팔거나 합병해 3개 사로 줄이고 부동산과 계열사 지분을 팔아 연말까지 5천억원을 조달하겠다는 구조 조정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주)새한과 새한미디어 주가가 17·18·22일 연속 하한가로 떨어진 것이 좋은 예. 자금을 회수하려는 제2 금융권의 움직임에도 제동을 걸 수 없었다.

새한이 시장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것은 무엇보다 오너들이 경영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새한 오너들은 이영자 회장 퇴진이라는 어정쩡한 카드만 내밀었을 뿐 이재관 부회장 체제를 고수하려 했고, 사재 출연도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막판까지도 삼성그룹 지원에 연연했다. 이재관 부회장은 이건희 삼성 회장의 조카. 이건희 회장이 1996년 계열 분리되어 삼성 품에서 떠난 새한을 지원할 의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친인척 그룹을 돕는다는 세간의 곱지 않은 여론에 밀려 뜻을 접은 것으로 보인다.

한빛은행이 밝힌 올 4월 말 현재 새한그룹의 부채 규모는 2조3천9백억원. 이 가운데 금융권 부채가 1조4천2백억원이며, 무보증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이 9천7백억원에 달한다. 매출 규모에 비해 빚도 많지만, 빚 구조가 단기부채가 40%가 넘는 악성인 점이 결정타였다.

종금사 자금 회수가 도화선

새한그룹이 벼랑 끝에 내몰린 원인이 무엇일까. 새한 사태의 도화선이 된 것은 5월 들어 일부 종합금융사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일어난 여신 회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새한이 경영 위기에 봉착한 근본 원인은 한마디로 경영 잘못에 있었다. 새한은 1995년 비디오 산업이 활황을 구가하자 필름 사업에 대규모로 투자했다. 1996년 후반기부터 필름 경기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는데도 새한은 1998년까지 투자를 강행했다. 이 때 투자한 금액이 무려 1조2백억원. 무리하게 외형을 확장해 경영난이 심해지자 새한은 1조원 이상을 투자한 구미2공장(필름)을 6천억원을 받고 지난해 일본 도레이 사에 매각했다. 한마디로 밑지는 장사를 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재관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 추진한 환경 및 2차 전지 사업이라는 신규 사업도 신통치 않았다. 빚은 많은데 현금 창출 능력이 떨어지니 경영 위기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주력 제품이 폴리에스테르 섬유인 (주)새한은 지난해 매출 1조1천9백억원에 5백54억원 적자를 냈다. 새한미디어 역시 비디오테이프 시장 침체로 작년에 매출 3천6백36억원에 당기 순손실 3백82억원을 기록했다. 올 1/4분기에도 (주)새한과 새한미디어는 각각 1백63억원, 51억원 적자를 냈다. 증권사의 한 애널리스트는 “전형적인 구경제 기업인 새한은 수익 모델이 신통치 않았고 가족 경영이라는 구태를 벗지 못해 위기에 봉착했다”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번 사태가 새한에서 끝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제2, 제3의 새한 사태가 불거질 공산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증시 주변에서는 또 하나의 그룹이 위기에 빠질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다. 그동안 정부의 인위적인 저금리 정책에 기대어 많은 기업들이 장기 투자자금이나 만기 도래하는 차입금을 단기 여신으로 메우는 위험천만한 곡예를 해왔다. 이것이 금융권의 2차 구조 조정을 맞이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기업 부도가 줄을 잇는다면 고스란히 은행 부실로 연결될 터이고, 이는 가뜩이나 공적 자금 조성에 허덕이는 정부를 더욱 궁지로 몰게 된다. 국가 신인도가 추락할 것은 불문가지.

새한 사태는 국제통화기금 위기를 겪으면서 정부와 시장 참여자들의 위기 관리 능력이 다져졌는지를 시험하는 첫 번째 고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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