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동 총리 지명의 의미
  • 안철흥 기자 ()
  • 승인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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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민련 절묘한 공조 복원… 합당설도 모락모락
김대중 대통령은 이한동 자민련 총재를 총리로 지명함으로써 그가 자민련과의 관계 복원을 향후 정국 설계의 나침반으로 삼고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한광옥 비서실장은 5월 22일 이한동 총리 지명 사실을 발표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공동 정부를 자민련과 함께 실현시킨다는 정신에 따라 이총재를 총리로 지명했다”라고 지명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총선 직후부터 DJ는 자민련과의 공조 복원을 끊임없이 모색했으나 그럴 만한 명분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두 당을 연결해 주던 ‘마지막 끈’인 박태준 전 총리가 낙마했는데, 위기가 곧 기회로 역전된 셈이다.

고민은 JP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총선 직전 공조 파기와 야당행을 선언한 JP로서 먼저 손을 내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박총리가 낙마한 직후 여권의 총리 추천 권유를 받으면서도 JP는 여러 차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내심 그도 박총리 낙마가 자신을 굽히지 않고도 공조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DJ는 ‘JP에게 공을 쥐어주는’ 모양새를 취했고, JP 또한 ‘받지도 않고 거절도 않는’ 특유의 처신으로 DJ의 청을 수락했다. 고난도 해법이 필요할 듯 보였던 두 김씨의 고민을 이총리 지명이라는 카드가 단칼에 날려버린 것이다. ‘단칼’은 이 총리 내정자의 오랜 별명이기도 하다.

때문에 여권 안에서는 이한동 총리 지명자의 향후 역할에 대한 기대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기도 하다. ‘국정 공조’ 수준으로 복원된 두 당의 관계를 ‘의정 공조’ 수준까지 확대하는 것에서부터, 정계 지도의 변화와 관련된 역할에 이르기까지 그를 바라보는 여권의 눈길은 심상치 않다.

이한동 총리 지명자도 이 점을 분명히 깨닫고 있는 듯하다. 그는 총선 전 자신의 입으로 공조 파기를 선언했지만, 총리내정설이 나돈 다음부터는 완전히 다른 행보를 취했다. JP와 자민련 내부의 반발에 그는 한마디도 동조하지 않았다. 지명되기 하루 전 그는 “공동 정권을 출범시킨 끈은 끊으려 해도 안되는 숙명적인 것이다”라면서 공조 복원을 미리 암시하기까지 했다.

그는 또한 총리 지명 과정에서 막후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한광옥 실장이 그와 상의하고, 그가 JP에게 여권 핵심의 의중을 전한 다음, 한실장이 다시 JP를 찾아가 ‘암묵적 동의’를 받아내는 순서로 총리 지명이 이루어졌다. 총리는 자민련이 맡아야 한다는 소극적인 논리를 벗어나 직접 나서서 ‘제 머리를 깎는’ 정치력을 발휘한 것이다.

정상회담 전 DJP 회동 주선할 듯

그런 측면에서 그는 전임자인 박총리가 경제 총리를 자임하면서 정치 현안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었던 것과 다르게 처신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공동 정권의 계약 당사자가 아니다. 나중에야 전문 경영인으로 자민련에 영입되었다. 그는 자민련 몫의 총리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해야 자신의 설 자리가 분명해진다는 점 또한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전임 총리와 달리 ‘정치 총리’로서의 위상을 서둘러 확보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고 정치권에서는 전망하고 있다. 우선 이 총리 지명자는 DJP 회동을 성사하는 데 일조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정치 총리로서의 역할을 시작할 것 같다. 그는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회담 전에 두 분이 만나는 게 순리’라면서, 자신이 주선자 역을 맡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여권 일부에서는 이총리 지명을 정계 개편과 후계 구도를 비롯한 정치 일정과 연결해 분석하려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자민련의 교섭단체 구성이 난망한 상태에서 공조가 복원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두 당의 합당설까지 함께 ‘복원’될 가능성이 크다”라고 진단했다. 그럴 경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 지명자가 처신할 공간은 커질 수밖에 없다. 최근 민주당이 호남지역 무소속 당선자 4명을 입당시키고, 정몽준 의원 영입을 본격 추진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점도 정계 개편과 관련지어 눈여겨 볼 부분이다. 자민련의 한 관계자도 “교섭단체 건을 마무리짓지 않고 이총재가 총리로 갔기 때문에 자민련 안에서도 합당론이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합당론이 민주당의 자가 발전만은 아닌 셈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지명자의 역할이 무한대로 커질 수도 있다. 문제는 그가 오너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처지가 역설적으로 그를 자유롭게 만들 수도 있다고 정치권 내부에서는 전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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