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도범에 조롱당한 정치권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9.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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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량 낮추려 잔꾀 부려… 정치권 덩달아 난리법석
도둑 하나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도둑은 ‘훔쳤다’고 하고, 고관 대작들은 ‘도둑맞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도둑이 턴 곳이 고관 대작의 집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자, 고관 대작(김성훈 농림부장관)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결백’을 강조했다. 어쩌다 도둑의 말 한마디에 고관 대작이 기자 회견을 열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을까.

그 이유는 도둑이 ‘현명’하게도 정치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이 주소지인 도둑 김강룡(32)은, 주소지가 있는 한나라당 안양 만안지구당 위원장 앞으로 진정서를 썼다.

진정서 첫머리에서 도둑은 ‘명백한 선거법 위반 사례를 폭로한다’며 정치권을 질타했다. 이어서 자신의 범죄 사실을 검찰과 경찰이 축소해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이 대목에서 검찰은 “그는 히로뽕 사범이다. ‘깽판’을 내서 자신을 영웅시하려는 범죄자인 그의 말은 일고할 가치도 없다”라고 단언했다.

김강룡이 범죄 내용 술술 분 까닭

그런데 도둑이 주장한 대로 유종근 전북도지사의 서울 거소에서 3천여 만원이 털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검찰 기소장에서 빠져 있다. 그러니 ‘일고할 가치도 없는 것’은 검찰쪽 주장일 뿐이다. 세간의 눈초리는 유지사의 68평짜리 서울 거소로 쏠렸다. 유지사측은 그 집이 전북도 서울사무소 직원 사택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직원 사택에 현금 3천여만원을 두는 지사가 있을까. 더구나 도둑은 이 곳에서 유지사 부인의 진주 반지도 훔쳤다.그러자 3천여만원이 부정하게 받은 돈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유지사는 ‘공금이고 처남 사업 자금’이라고 해명했다. 공금을 은행에 넣어 관리하지 않고 직원 사택에 보관한 것도 이상하지만, 유지사는 12만 달러 유무로 쟁점을 옮겨 위기를 빠져나갔다. 유지사는 단 1달러도 도둑맞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배경환 안양경찰서장도 도둑한테 당했다. 배서장은 8백만원을 도난당했다고 말하지만 도둑은 5천8백만원을 훔쳤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배서장이 도둑맞은 것이 분명한 만큼 세간의 눈초리는 왜 경찰서장이 김치 냉장고에 돈을 넣어 두었느냐는 데 쏠리고 있다. 도둑은 김치 냉장고에서 10만원씩 든 봉투 5백80장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진정서에 ‘선거법 위반’을 적시한 것이다.

인천지검은 김강룡을 내시경으로 아파트를 털어온 김영수(47) 등과 함께 기소했다. 하지만 김강룡은 “김영수와는 아는 사이지만, 김영수가 아닌 다른 범인과 도둑질을 해 왔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강룡은 더 많은 형벌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검찰이 모르는 범죄 사실을 털어놓은 셈이 된다. 김강룡은 왜 자신의 범죄 사실을 부풀리는 것일까. 김강룡 덕분에 ‘한 건’ 올린 한나라당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절도는 최고형이 6년인데, 6년형을 받는 경우는 없다. 대개 2년6월형이다. 그런데 일부 범죄 사실만으로 범죄자를 기소했다가 출소하면 다른 범죄 사실을 찾아내 또 기소하는 형사들도 있다. 이렇게 되면 범죄자는 계속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김강룡은 이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이번에 잡힌 김에 모든 범죄 사실로 기소되고, 출소 후에는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자유롭게 지내겠다는 생각으로 범죄 사실을 공개한 것이다.”

이 설명은 매우 그럴듯하지만 이는 단순 절도일 때만 해당된다. 단순 절도는 건별로 기소되기 때문에 한번 기소될 때 모든 범죄 사실을 털어놓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김강룡처럼 상습 절도, 그것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으로 기소된 범죄인들은 범죄 사실이 늘어날수록 형량이 무거워진다. 전과 12범으로서 스스로를 ‘형법 빠꿈이’로 생각한 김강룡이 뭔가를 착각한 것은 아닐까? 도둑놈이 정치를 이용하고, 정치인이 도둑놈에게 놀아난 해괴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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