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사건 ''또 다른 숙제'' 배상 문제
  • 崔寧宰 기자 ()
  • 승인 2000.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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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조사단 ‘살육 현장’ 방문… 한국 정부, 배상 요구안 갖고 있어야
노근리 문제를 놓고 한·미 간의 조사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미국측 대책단장인 루이스 칼데라 육군장관 등 미국 조사단 18명은 지난 1월9일 내한해 12일까지 조사를 벌이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측 입장은 지금 현재 철저하게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후 조처는 조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검토할 단계가 아니라고도 한다. 조사 시한에 대해 한·미 양국 조사단은 가능하면 한국전쟁 50주년인 올해 6월25일 이전에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근리와 비슷한 다른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해 미국측은 당장은 현실적으로 조사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하지만 주한 미국대사관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정치참사관은 <시사저널>과의 전화 통화에서 “다른 사건을 미국이 조사하지 않겠다는 한국 언론 보도는 잘못된 것이다. 다른 사건에 관한 부분은 한·미 두 나라가 추후 논의해서 결정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방한 조사에서 미국 조사단은 과연 미군이 무고한 양민을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살해했느냐를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의도적이라는 말은 ‘고의성’이 있었느냐는 뜻이다. 하지만 이미 피해자와 가해자 증언으로 드러났듯이 미군은 흰옷 입은 무리가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미국 지상군은 대상을 바로 눈앞에 두고 확인하면서 조준 사격과 기관총 사격을 했다. 살해의 ‘고의성’ 여부는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 자체로 성립된다. 눈을 감고 쏜 것도 아니고, 식별이 불가능한 야간에 사격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는 명백히 범죄 행위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발포가 현장에 있었던 병사들의 개별적인 판단이었는지 상부로부터 내려온 조직적인 판단이었는지를 가리는 것이다. 만약 발포 결정이 현장 병사들의 즉흥적인 판단이 아니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발포 판단, 누가 했는지가 중요

피난민 행렬에 인민군이 섞여 있다 할지라도, 민간인 행렬을 전투원으로 취급하는 것이 미군 작전 지침이나 일반 명령, 또는 묵인 사항으로 굳어져 있었다면 이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전쟁 범죄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런 탓에 일단 노근리 사건에 한정해서 조사하겠다는 미국 의도에는 문제가 있다. 노근리와 비슷한 민간인 희생 사건을 동시에 조사해야만 조직적 판단이었는지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노근리와 비슷한 사건이 한국전쟁 때 광범위하게 벌어졌다면 개인의 전쟁 범죄 행위를 떠나서 미국의 조직적 전쟁 범죄로 구성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는 국가 간의 배상 문제로 연결되는 사안이다.

미국측이 이 정도까지 조사를 진행할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현단계에서 우리 정부와 조사단이 반드시 검토해야 할 사안은 배상 문제이다. 조사가 6월 안으로 끝날지는 모르지만 이 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거론될 것이다. 조시현 교수(성신여대·국제법)는 “우리 정부가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나름으로 사후 처리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배상은 두 가지 안을 검토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안은 제3국 인사로 배상위원회를 꾸려 이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미국이 완전히 위법성을 인정한 경우이다. 이는 문제를 사법적으로 제대로 해결하는 방법이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단점이 있다. 한·미 양국은 모두 시효 문제에 걸리기 때문에 특별법을 입법해야 한다. 두 번째 안은 현실적인 가능성이 높은 안으로, 총액 배상제(lumpsum settlement)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일정 금액을 한국에 지급한 뒤, 한국 정부가 이를 피해자에게 나누어 지급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빠른 시간에 문제를 해결하는 장점은 있지만, 미국측이 위법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위법 사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국가 간에 ‘배상’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위로금 형태로 ‘보상’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 안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측 조사단은 방한 마지막 일정으로 1월11일 청와대를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다.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의미 심장한 말을 했다. 한·일간 외교 현안인 종군 위안부 사례를 든 것이다. 김대통령은 “일본측은 1965년 한·일 협정으로 종군 위안부 문제를 다 처리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이 일본 현지에 가서 시위를 하고, 지금도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유엔 인권위원회도 이 문제를 조사해서 일본측에 책임이 있다는 조사 결과를 냈다”라고 말했다. 이는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노근리 사건이 잘못 처리되면 종군 위안부 문제처럼 유엔 무대에까지 사안이 확대되고 피해자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시위를 계속할 수도 있다는 일종의 ‘으름장’으로 볼 수 있다.

앞으로 한·미 공동 중간 평가를 위해 한국측 진상조사반이 2월에 미국을 방문할 계획이다. 중요한 것은 한·미 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피해자인 한국측이 판단할 때 조사 결과가 공정하고 객관적이지 못할 때는 얼마든지 다시 조사를 요구할 수 있다. 이번만큼은 한국 정부도 끈기를 보여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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