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위기’ 진단
  • 朴在權·李哲鉉 기자 ()
  • 승인 1997.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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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멕시코 사태·금융기관 연쇄 부도 가능성 희박
꽃피는 춘 4월에 한국 경제는 엄혹한 한파를 맞을 것인가. 지금 경제 전문가들은 두 가지 질문에 답하느라 바쁘다. 4∼5월에 한국은 과연 제2의 멕시코 사태를 맞을 것인가, 금융 대란이 터질 것인가. 제2의 멕시코 사태는 해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상황을 가정한 것이고, 금융대란설은 한보그룹 부도 여파로 기업과 금융기관이 줄줄이 쓰러지는 사태를 상정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각기 해외 시장과 국내 시장에 얽혀 있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첫 번째 질문. 94년 12월의 멕시코처럼 해외 자금이 대거 빠져나가는 위기 상황이 발생할 것인가. 이에 대해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한국 경제 규모와 성숙도는 멕시코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앞서 있다는 것이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한보·삼미 부도 때문에 한국 경제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한국 경제가 그렇게 우스운 경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은행 김영대 조사 담당 이사도 “현재 상황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1/4분기 경제 성장률이 5%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뿐만 아니라 멕시코의 환율 정책은 한국과 크게 다르다. 멕시코 사태 때 해외 자본이 대거 빠져나간 것은 단순히 멕시코 경제가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라, 멕시코 정부가 인위적으로 환율을 책정해 절하 압력을 막았기 때문이다. 즉 페소화 가치가 정부의 인위적인 환율 정책 때문에 과대 평가되어 있다가, 94년 12월 제딜로 대통령이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 환율을 자유화하자 페소화 가치가 일시에 폭락하고 해외 자금이 동시에 빠져나간 것이다. 반면 한국은 외환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환율이 결정되기 때문에, 페소화처럼 원화 가치가 갑자기 폭락할 가능성이 없다.

“한보 사태와 부도 사태는 무관”

그럼에도 최근 원화 가치가 급속도로 떨어지자, 제2의 멕시코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기업들은 환차손을 우려해 달러화 사재기에 나섰고, 환율이 어디까지 뛸지 몰라 불안해 한다. 그렇다고 한국은행이 나설 수도 없다. 2월 말 현재 외환 보유고가 2백98억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역 수지 적자 폭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지만, 단기간에 부양책을 쓰다가는 오히려 사태만 악화시킬지 모른다는 것이 정부의 고민이다. 좌승희 원장은 “환율은 해외 자본 유출입을 조절하는 노릇을 한다. 정부가 자칫 잘못 개입했다가는 오히려 멕시코처럼 될 수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질문. 4∼5월에 금융 대란이 일어날 것인가. 금융대란설의 골자는 한보가 발행한 1조원어치 융통 어음 만기일이 4∼5월에 집중되기 때문에, 이 어음을 보유한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부도가 이 기간에 줄을 이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모호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우선 한보의 융통 어음 규모가 과연 1조원이나 되느냐 하는 점이다. 진성 어음은 거래가 이루어진 경우에 발행하기 때문에 규모를 파악할 수 있지만, 융통 어음은 기업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하는 것이어서 정확히 집계하기 어렵다. 특히 한보처럼 서류의 상당 부분을 폐기하고, 남은 자료도 조작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는 실태를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김영대 이사는 “한국은행도 그 규모가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털어놓았다.

한보의 융통 어음 만기일이 4∼5월에 몰려 있다는 데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재정경제원 금융제도담당관실 김주형 서기관은 “한보그룹 관계자로부터, 한보 융통 어음 만기일은 2∼3월에 가장 많고, 4월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들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2~7월에 골고루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4∼5월 대란설은 근거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 융통 어음은 주로 누가 갖고 있을까. 대다수 전문가는 할부 금융이나 파이낸스사 등 제2 금융권과, 한보와 관련한 하청업체들에 주목한다. 한보그룹이 부도날지 모른다는 소문은 이미 부도나기 6개월 전부터 사채 시장에서 돌았다. 따라서 정보력 있는 시중 은행들이 한보 어음을 대량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반면 정보력에서 뒤지는 제2 금융권이나 한보 관련 업체들은 융통 어음을 미처 현금화하지 못하고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대외 신용을 생명으로 여기는 금융기관의 속성상 한보 어음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 밝힐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보 어음을 가진 금융기관들은 신용을 유지하기 위해 어음 보유 사실을 숨기고 시중에 유통시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한보의 융통 어음이 특정 금융기관에 지나치게 몰려 있지 않는 한, 한보 때문에 금융기관이 망할 가능성은 적다.지금의 경제 위기에 대해 정부는 ‘구조 조정만이 살길’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건실한 기업이 악성 유언비어나 금융권의 자금 대출 기피로 인해 무너지는 것은 방치하지 않겠지만, 부실 기업이 쓰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강경식 부총리 겸 재경원장관은 3월24일 8개 시중 은행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건실한 기업이 흑자 도산하는 일이 없도록 자금을 적극 대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28일에는 주병국 종합금융협회장과 연영규 증권업협회장과 만나, 일시적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은 적극 지원해 주라고 요청했다. 아울러 주식 시장에서 악성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들에 대한 단속을 시작했다.

그 결과 자금 압박으로 부도설이 나돌던 기업들이 안정을 되찾고, 주식 시장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기업이 진로그룹이다. 3월20일부터 24일까지 하한가를 기록하던 진로의 주식값은 25일 약보합세로 돌아섰고, 26일에는 상종가를 쳤다. 그후 부도설도 점차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한신공영도 마찬가지다. 부도설에 휘말렸던 이 기업은, 하나은행이 계열사인 뉴코아백화점에 3백억원을 대출해 준 데 힘입어 안정을 되찾고 있고, 청구주택도 대구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뒤 7천6백40원까지 떨어졌던 주가가 1만1천1백원으로 껑충 뛰며, 부도설도 가라앉았다.

그러나 부실 기업에 대해서는 냉혹하다 싶을 정도로 정부의 태도가 단호하다. 재경원 김주형 서기관은 “쓰러져야 할 기업은 쓰러져야 한다”라고 잘라 말한다. 지난해 실질 경제 성장률은 7.1%. 그러나 여기에는 상당한 거품이 포함되어 있다. 팔리지도 않는 물건을 만들어 재고로 쌓아 놓고, 재고를 담보로 하여 금융 대출을 받는 부실 기업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해 재고 증가율이 매월 15∼20%에 이르렀지만, 기업 부도율은 낮은 수준을 유지했고, 생산량도 줄지 않았다. 실업률에도 커다란 변동이 없었다. 한국은행 김영대 이사는 “한보 사태가 터진 뒤에 자금 시장이 경색되어 쓰러진 기업들은 대부분 악성 부실 기업이다. 그런 기업들이 부도난 것은 한보 사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불안 심리 확산되면 위기 올 수도

정부가 구조 조정이라는 원론적 대응 방침을 고수하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엇갈린 평가를 내놓고 있다. 한 민간 연구기관 연구위원은 “우리 기업과 금융 시장이 취약한 것은 정부 때문이다. 은행이 쓰러지지 않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반면 좌승희 원장은 “한보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정부에 있다. 이번 사태는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 정책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다. 앞으로 정부는 뒤로 빠지고 시장 경제 질서가 활성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국 경제계를 덮쳐 누르고 있는 4∼5월 금융대란설과 제2의 멕시코 사태설. 그같은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불안 심리가 이상 상황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기업과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심각한 위기감을 해소해 주지 못한다면, 누구도 원치 않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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