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시사저널> 고소·고발 전모
  • 김 당 기자 ()
  • 승인 1996.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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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5천t 북한 지원’ 보도에 대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 훼손 혐의
청와대가 <시사저널>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언론 보도와 관련해 대통령 비서실장이 직접 대통령의 고발 당사자로 나서 언론사 기자와 간부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고발하기는 처음이다.

에이펙 정상회담에 참석 중인 김대통령을 대신해 11월22일 김광일 비서실장은 고소·고발인 자격으로 낸 고소·고발장에서 <시사저널> 김 훈 편집국장, 박상기 편집장, 이교관 기자 등 ‘피고소인들이 김영삼 대통령과 전·현직 비서실장 등을 비방할 목적으로 주간지 <시사저널>(11월28일자 제370호 가판)에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출판함으로써, 불특정 다수의 국민들로 하여금 김영삼 대통령 등이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등한시한 채 정치적 목적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민주적 절차에 따르지 않고 정책을 집행하는 듯한 인식을 심어 주었다’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대통령 및 고소인(김광일 실장) 등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가와 국민이 입게 된 무형의 피해 또한 지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고소인의 경우에는 고소인으로서, 대통령과 한승수 전 비서실장의 경우에는 고발인으로서 본 고소·고발장을 제출한다’라고 그 사유를 밝혔다.
야당 “언론·출판의 자유 침해”

한편 <시사저널>이 제370호에 게재했다가 삭제한 문제의 기사와 관련해, 11월21일 국회 예결위에서 이를 처음 공론화한 국민회의는 11월25일 낸 정동영 대변인 명의의 성명에서 이번 고소 사건에 대해 ‘청와대와 권력이 개입해 출판을 막아 놓고 다시 그 출판물을 문제 삼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발한 것은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설령 법적 고발이 가능하더라도 이런 작태는 도덕적으로 부도덕하다’라고 비난했다.

정대변인은 성명에서, 청와대와 안기부가 ‘청와대, 북한에 밀가루 제공’을 보도한 <시사저널>을 인쇄 단계에서 폐기토록 한 것은 명백한 사전 검열이며,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침해하는 언론 탄압의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전제하고, ‘청와대는 <시사저널>의 보도 내용이 사실 무근이며 국익에 현저한 손해를 끼칠 것이기에 막았다고 변명하지만, 청와대측의 논리는 모든 언론이 대통령 비서실장에 의해 국익에 유익한지 여부를 검토받아야 한다는 사전 검열 제도의 부활을 예고한다. 때문에 보도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문제의 기사가 포함된 <시사저널>의 발매를 막은 것이 핵심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이 날 오전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참석한 간부회의에서도 ‘북한에 대한 밀가루 제공’ 문제에 대해 조사소위를 구성해 언론 보도 통제 진상과 비서실장 국회 답변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자 초점이라고 전제하고, 조사소위 구성에는 불응하면서 <시사저널>을 고발해 검찰 수사에 의존하려는 여당의 태도는 떳떳지 못하다는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시사저널>은 당초 11월20일 발매되는 제370호(발행일자 11월28일)에서 ‘청와대, 북한에 밀가루 5천t 제공’ 제하의 기사를 내보낼 예정이었다. 당시 <시사저널>은 11월19일 밤 9시께 인쇄를 중단할 때까지 정기 구독 10만여 부를 포함한 총 17만부 가운데 먼저 찍는 지방판 3만여 부를 인쇄하고 있었다. 이 기사는 북한의 대외 경협 창구이자 밀가루 제공 사업을 중개한 금강산개발총회사(박경윤 회장) 고위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인용해 ‘청와대가 지난 4월께 북한에 밀가루 백만 달러어치를 극비리에 제공했다’고 기술했다. 또 이 기사는 ‘밀가루 공급 사업은 청와대 비서실이 주도했으며, 그 목적은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하는 데 북한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였다’고 기술했다.
청와대 요청으로 정작 기사는 안 실려

그러나 이 기사를 담은 <시사저널> 제370호는 청와대 및 안기부 고위 관계자들이 문제의 기사가 나가는 사실을 인지해 개입하는 과정에서 관련 기사가 삭제된 채 재인쇄되었다. 그 과정을 소상히 밝히면 이렇다.

<시사저널> 편집국은 11월19일 제370호에 대한 통상적인 최종 마감을 거쳐 편집 및 제작 절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1월20일 오후 3시께 인쇄소로부터 인쇄 교정본을 받아 보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따라서 제370호는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인쇄되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 8시 이후 <시사저널> 신중식 발행인에게 청와대 및 안기부 고위 관계자들로부터 연쇄적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통화의 내용은 한결같이 기사 내용이 허위 사실 또는 사실 무근이므로 삭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밤 9시께는 <시사저널> 보도와 관련해 안기부 담당관이 김 훈 국장과 박상기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대북 밀가루 지원 관련 기사가 나가는지를 확인하고 내보내지 말라고 요청하는 전화였다. 김 훈 국장은 안기부 담당관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미 인쇄 중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밝혔다. 이 안기부 담당자는 나중에 자신은 관련 기사가 <시사저널>에 나가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았다고 밝혔다.

신중식 발행인은 인쇄를 중지시켜 놓은 상태에서 밤 10시께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시사저널> 간부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신발행인은 “김광일 비서실장, 반기문 외교안보수석, 윤여준 대변인 등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이 한결같이 기사 내용이 사실 무근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이 기사를 그냥 내보내기는 어렵다”라고 발행인으로서의 입장을 밝혔다.

신발행인은 다음날 오전 2시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관련 기사 삭제 및 재인쇄를 최종 결정하면서 그 배경에 대해 △청와대 및 안기부의 압력에 굴복하거나 △기사 자체에 신빙성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기사가 사실에 입각한 것이라는 충분한 정황 근거가 있지만 당사자들이 제소해올 경우에 이를 방어할 물증(증거 자료)이 없기 때문에 일단 청와대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밝혔다.

<시사저널> 편집국 간부와 일부 기자 들은 발행인의 결정에 반대했다. 반대의 핵심 논거는 이번 기사와 관련해 이미 일부 외신과 국내 언론에 보도자료를 냈으므로 <시사저널>이 보도하지 않더라도 다른 언론이 이 사실을 인지해 보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인쇄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삭제된 기사를 작성한 이교관 기자와 그 기사의 담당 데스크가 해당 기사의 삭제 및 재인쇄 경위를 밝히는 보도자료를 일부 언론사와 야당 대변인실에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해당 기사를 삭제하고 재인쇄하기로 한 결정에 따라 공보처 납본본을 제외한 이미 인쇄된 전량을회수한 상황에서 그 다음날인 11월21일 국회 예결위에서 불똥이 튀었다.

국민회의 김영진·이해찬 의원 등이 청와대 비서실에 대한 예산 심의에서 김광일 비서실장이 참석한 가운데 <시사저널> 기사와 관련해 청와대의 언론 통제(사전 검열) 여부와 대북 밀가루 지원 여부를 따졌다. 김광일 실장은 이 자리에서 언론 통제를 한 사실이 없고, 밀가루를 보낸 적도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김실장은 기사에서 중개인으로 기술된 재미 교포 김양일씨를 만난 적은 있다고 답변했다.

또 김실장은 처음 답변 때는 보도 통제 사실을 부인하면서 “옛날 정권 같으면 사전에 알아 가지고 통제했을 것이다. 뒤늦게 바로 발매되는 순간에 알게 되었다는 것은 요즈음은 보도 통제가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시사저널>에 관련 기사가 실렸다는 것을 책을 받아보고 알았는지 아니면 사전에 정보를 통해서 알았는지를 묻는 이해찬 의원의 추궁이 계속되자 김실장은 “기사가 나간다 하는 정보를 통해서 알았다”라고 엇갈린 답변을 했다.

다음날 재경원 예산에 대한 국회 예결위 회의에 참석한 한승수 부총리도 대북 밀가루 제공 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나 한부총리 또한 “김양일씨는 재미한인식품상협회 회장을 했던 사람으로 북한에 자주 드나드는 재미 교포 사업가이며, 주미 대사 시절에 알게 되었다”라고 답변했다. 결국 <시사저널> 보도가 촉발한 이른바 ‘밀가루 북송’ 공방과 그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국회 조사소위 구성을 둘러싸고 여야가 대립함으로써 예결위는 4일째 공전했다.

이 사건을 배당 받은 서울지검 형사 5부(이종왕 부장검사)는 11월23일 대통령을 대신한 비서실장이 고소·고발한 ‘청와대, 북한에 밀가루 5천t 제공’ 제하의 기사 건과 관련해 <시사저널> 김 훈 편집국장 등 피고소·고발인에게 11월25일 오전 10시까지 검찰에 출두해 달라고 구두로 통보했다. 이에 대해 김 훈 국장 등 <시사저널> 관계자는 이 날은 기사 마감 및 제작 일정상 편집국을 비울 수 없으므로 하루 뒤인 11월26일 검찰이 지정하는 시각에 출두해 조사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따라서 국회 예결위에서 언론 통제(사전 검열) 여부와 대북한 밀가루 제공 여부가 공론화함으로써 정치권을 ‘밀가루 정국’으로 몰고간 이번 사건은 일단 정치권의 공방에서 검찰의 수사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검찰, 수사 신속히 진행할 듯

검찰은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를 일단 신속히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의 경우 △일국의 대통령 비서실장이 고소·고발 당사자인 데다 △국회 예결위 공전에 직접 발단이 되었고 △남북 및 대미 관계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고소·고발인 및 관련자에 대한 조사와 내사를 거쳐 피고소·고발인에 대한 신속한 소환 및 수사로 이어질 것이라고 관측했다.

따라서 당초 이 사건은 △청와대와 안기부 고위 관계자들이 이미 인쇄 중인 기사에 대해 삭제 요청을 하지 않고 △삭제 요청 과정을 포함한 일련의 사태가 국회에서 공론화하지 않았다면 고소·고발인이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일반 형사 사건이나 다름없이 처리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언론 매체의 보도에 대해 대통령 비서실장이 고발 당사자로 나서는 초유의 사태로까지 번진 배경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기사가 정상적으로 배포되었을 경우, 사실 여부를 떠나 우선 잠수함 사건 이후 강공으로 치달은 정부의 대북 정책에 또 다른 혼선을 야기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가장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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