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관계 ‘얼음장’ 깨지려나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1996.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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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상회담서 ‘先 4자 회담, 後 사과’ 유화책 제시… 북한 불러낸 뒤 절충점 모색할 듯
지난 9월 북한의 잠수함 침투 사건으로 급속히 얼어붙었던 남북한 관계가 최근 마닐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인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4차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참석한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지난 11월24일 정상회담을 마친 뒤 언론 발표문을 통해 ‘잠수함 사건을 해결하고 긴장을 완화하며 앞으로 유사한 도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북한이 우리가 수락할 수 있는 조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외교적 수사에 가린 이 문구에는 지난 9월 잠수함 사건 이후 꼬일 대로 꼬인 남북 관계와, 이 사건 여파로 갈등의 골이 깊어진 한·미 관계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해법이 숨어 있다는 지적이다.

“명분보다 실리 택한 듯”

사실 우리 정부는 잠수함 사건 이후 북한이 먼저 사건을 도발했음을 시인해야 하며, 나아가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한다는 일관된 노선을 걸어 왔다. 즉 북한이 어떤 식으로든 잠수함 사건에 대해 우리측에 사과하지 않는 한 경수로 사업을 포함한 대북 경협을 일절 하지 않겠다고 공언해 왔다.

또한 우리측은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4자회담이 열리기 위해서도 북한이 먼저 사과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했었다. 이같은 강경 일변도의 원칙이 이번 마닐라 정상회담을 고비로 사실상 철회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제의한 지 6개월째 겉돌고 있는 4자 회담 문제와 관련해 김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북한의 사과가 없더라도 4자 회담 설명회는 열릴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말하자면 북한의 잠수함 사건 사과 여부와 4자 회담과의 고리를 우리측이 먼저 풀어 준 셈이다. 이와 관련해 반기문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현지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4자 회담 설명회에 참석해 잠수함 사건을 사과하면 우리측에 직접 사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한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같은 발언은 북한이 공개적으로 우리 정부에 대해 공식 사과할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우선 북한을 4자 회담 설명회에 이끌어낸 뒤 절충점을 모색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외교안보연구원 윤덕민 박사는“외교라는 게 어차피 실리를 추구하는 것인데, 이번에 우리가 명분보다는 실리 쪽을 택한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외교 전문가는 잠수함 사건의 여파로 도발 당사자인 북한은 물론 피해자인 한국,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 재선 후 북한과 급속한 관계 개선을 꾀하고 있는 미국 등 세 나라 모두가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던 상황이었으므로 이번 조처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막판 설득이 주효

그럼에도 대북 유화적인 문구가 포함된 이번 언론 발표문이 작성되기까지는 잠수함 사건 이후 나름의 해법 찾기에 골몰해온 미국측의 막판 설득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져, 앞으로의 한·미 공조에 의문점을 던져주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 북한이 4자 회담 공동 설명회에 참석할지, 또 참석한다면 그 자리에서 한국에 대해 사과까지는 아니더라도‘유감’정도의 의사 표시를 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우리 정부 당국자들의 말에 따르면, 북한은 아직은 잠수함 사건과 관련해 우리측이 요구하고 있는 사과가 아닌‘유감’수준에서, 그 대상도 한국이 아닌 미국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미묘한 국면에서 북한이 11월24일 스파이 혐의로 현재 억류되어 있는 미국인 에번 헌지커씨 석방 교섭을 위해 평양에 들어간 빌 리처드슨 미국 하원의원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할 가능성도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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