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테러국 명단에 북한 잔류시킨 까닭
  • 卞昌燮 기자 ()
  • 승인 1997.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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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국 교역법 대상국에도 끼여…관계 진전되면 빠질 수도 
해마다 4월 말이면 미국 국무부는 테러국 명단을 발표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북한이 테러국 명단에 끼었다. 이는 근래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4자 회담 제의에 북한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 추가 완화설이 흘러나오고 있는 시점임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국무부가 지난 4월30일 발표한 테러국 명단에는 북한말고도 리비아·이란·이라크·시리아·쿠바·수단이 몇년째 단골 고객으로 끼어 있다. 일단 테러국으로 지정되면 미국의 경제 제재는 물론 미국내 자산이 동결된다. 또 국제 금융기관으로부터 금융 지원을 받을 수 없으며, 각종 국제 활동에 큰 제약을 받는다.

국무부측이 북한을 테러국으로 지정한 주된 이유는 지난해 10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생한 한국 외교관 피살 사건 연루 가능성, 87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사건, 83년 버마 아웅산 한국 정부 요인 암살 폭파 사건, 일본 적군파 요원에 대한 은신처 제공 등이다.
그러나 국무부측은 이런 장황한 이유를 들면서도‘북한이 87년 이래 테러 행위에 가담한 결정적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적시함으로써 이번 결정이 정치적 배경에서 나왔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즉 북한의 태도 여하에 따라 테러국 명단에서 뺄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북한, 강도 높게 ‘해제’ 요구

실제로 미국 국무부는 지난해 2월 테러 행위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의 문서를 접수한 뒤 한때 북한을 테러국 명단에서 해제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대북 정책에 강경 입장을 고수하던 국방부와 의회를 설득하지 못해 실패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테러 지정국 해제 여부는 전적으로 대통령 손에 달려 있다. 즉 번거롭게 의회의 승인을 거칠 필요 없이 대통령의 간단한 행정 명령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북한이 앞으로 4자 회담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미·북한 간에 남아 있는 미사일 수출 금지 문제나 미군 유해 문제 등에 대해 성의 있는 반응을 보이면 클린턴 대통령은 언제든 북한을 테러 지정국 명단에서 뺄 가능성이 있다. 외무부 산하 외교안보연구원의 한 북한 전문가는 “어차피 이 문제가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요하는 것인 만큼 해제 여부는 미·북한 관계가 진전하는 시점과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라고 지적했다.

북한은 현재 미국에 의해 테러국으로 찍힌 것말고도 적성국 교역법과 관련한 대상국에도 끼여 있다. 테러국 지정과 적성국 교역법은 미국이 국제 사회의 이단국에 대해 적용하는 강력한 제제 수단이다. 현실적으로 이 두 가지 규제에 묶여 있는 한 북한의 대미 접근에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설령 미국이 앞으로 북한에 대해 테러 지정국 잔류에 따른 법적 걸림돌을 피해 경제 완화 조처를 발표한다 해도 적성국 교역법에 저촉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전 종전 이래 북한에 대해 경제 제재 조처를 취해온 법적 근거가 바로 이 법이기도 하다.

이같은 사정을 잘 아는 북한은 지난해 봄 대외경제위원회 김정우 부위원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고위 관리들을 만났을 때 테러 지정국 해제 문제를 강도 높게 거론했으며, 현재도 끈질기게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 지정국에서 빠지면 적성국 명단에서 빠지는 것도 시간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특정국을 테러 지정국에서 뺄 때의 주요 기준이‘최근 6개월간 테러 행위에 일체 가담하지 않았다’는 데 있는 만큼 북한의 요구가 그다지 무리는 아닌 듯 싶다. 국무부 발표대로 북한이 87년 이래 10년 동안 테러 행위에 가담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을 계속 테러 지정국 명단에 잔류시킨 한 배경에는, 최근 한반도 평화 정착과 관련한 4자 회담은 물론 미·북한 양국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회담에 북한을 적극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이해가 깔려 있다는 지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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