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와 김기섭·이성호의 '악연'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7.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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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 로비 창구로 두 사람 활용… 자금 관리·제공 혐의로 검찰행
김현철씨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알려진 김기섭 전 국가안전기획부 운영 차장과 이성호 전 대호건설 사장의 ‘악령’이 재계를 뒤덮고 있다. 한솔그룹이 김기섭씨의 자금을 관리해준 혐의를 받고 있으며, 대우그룹 관계자가 이씨에게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두 사람에 대한 검찰 수사에서는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 선정과 대호건설의 위장 매각 의혹도 파헤쳐질 것으로 보여, 연루된 대기업의 수는 훨씬 늘어날 전망이다.

김현철씨의 또 다른 측근인 박태중씨와 달리 이 두 사람이 유독 대기업들과 관련이 깊은 것은, 대기업 출신이거나 대기업과 거래가 잦은 중견 기업인이기 때문이다. 주로 중소기업으로부터 청탁조로 돈을 받아온 박씨와 달리, 두 사람은 대기업들의 로비 창구였으며 자기들의 재계 인맥을 활용해 거액의 비자금을 기업에 묻어두기도 했다.

김기섭씨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아남산업에 입사해 근무하다 삼성그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90년대 초 호텔신라 영업 담당 상무를 거쳐 삼성전관 전무로 발령이 난 상태에서 상도동 진영에 합류했다. 김씨는 특히 호텔신라 재직 때 YS가 오면 잘 모셨던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 때문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기업인이 정치인한테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가 70억원을 맡겨 관리하게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한솔그룹 조동만 부사장의 과외 교사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씨와 이건희 회장의 조카인 조부사장 간의 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은, 김씨가 아남산업에서 삼성으로 자리를 옮긴 것과 한솔그룹 모태인 전주제지의 계열사이던 호텔신라에서 승승장구한 것은 이런 인연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삼성그룹의 경우도 김씨를 김영삼 정부의 실세들과 접촉 창구로 활용하려 했던 흔적이 짙다. 현정부 들어 김씨와 친분이 있었던 현명관 호텔신라 사장(김씨가 호텔신라에 재직하던 시절 전무급 관리본부장 역임)을 발탁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얼마 동안 이건희 회장이 김기섭씨를 독대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아는 정부의 한 관계자는 “두 사람은 1년에 두 차례 정도 만났는데, 이회장이 김씨를 여전히 부하 취급하는 바람에 이 만남은 이내 중단되었다”라고 밝혔다. 특히 95년 말 터져나온 비자금 사건 당시 김씨가 전혀 힘을 써주지 않아, 김씨와 삼성그룹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악화했다는 것이 삼성그룹 내의 중평이다.

이성호씨는 6공 이후 늘 권력 핵심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던 이 건 세미냉장 대표의 장남. 이 건 대표는 대호건설을 설립하고 권력 핵심층과의 인연(이성호씨는 주영복 전 국방부장관의 사위)을 매개로 관급 공사를 대거 수주했으면서도, 일부러 자신의 회사가 건설회사 분류상 1급에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했을 정도로 용의주도한 사람이다. 이성호씨가 김현철씨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미국 샌터모니카 소재 페퍼다인 대학 재학 시절로, 당시 김씨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에 유학 중이었다(당시 이성호씨가 아버지를 졸라 김현철씨를 통해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에게 수십억원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대호건설, 수주 때 특별 대우 받았다”

문민 정부 들어서자 이미 김현철씨와 절친한 관계가 널리 알려져 있던 이성호씨 역시 재계의 로비 창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 회사 관계자가 검찰의 소환 조사를 받은 대우그룹은 대호건설에 자사의 건설공사를 맡겼다 돈을 떼였으나 위약금을 청구하지 않아 의혹을 사고 있다. 건설업체의 한 고위 임원은 “각종 수주에서 대호는 늘 예외적인 취급을 받았다”라고 주장했다.

이씨 부자는 지난해 잘 나가던 대호건설을 수산중공업에 팔았는데, 검찰은 이 거래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씨 일가를 잘 아는 한 인사는 “대호건설이 현정부 아래서 사업을 더 벌일 경우 문제가 되겠다는 판단 때문에 팔았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 건씨는 대호건설 매각 거래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체류하는 일이 잦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산중공업의 사실상의 모기업은 ㅎ그룹. 이 그룹의 한 계열사는 대호건설의 유선 방송 사업에 자본 참여를 하기도 했다. 검찰은 김씨의 PCS 사업 개입 혐의도 파헤치고 있어, 재계에서는 김기섭과 이성호 두 사람의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 몰라 노심초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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