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핵사찰 수용 선언한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4.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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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북·중 최고 지도부가 마련한 ‘핵 해법 로드맵’ 단독 입수·공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4월19~21일) 북·중 양국 최고 지도부가 마련한 ‘북핵 해법 로드맵’ 내용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중국 정부 소식에 정통한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가 최근 <시사저널>에 전한 이 북핵 해법 로드맵은 크게 6월 말로 예정된 3차 6자 회담을 앞두고 협상 분위기를 조성하는 단계와, 이를 바탕으로 3차 6자 회담에서 합의를 이루는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핵 해법 로드맵에 따르면, 분위기를 다지는 첫 단계를 위해 북한과 미국은 구두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내용을 합의할 필요가 있다.

즉 북한이 기존 핵 동결 선언에 이어 이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핵사찰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면,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다. 이어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겠다고 구두로 선언하면, 미국은 그동안 중단해온 중유 공급을 재개하고, 대북 적대 정책을 변경하겠다고 약속한다.

제3차 6자 회담에 앞서 북·미 양국이 비록 구두 형식이기는 하지만 이같은 사항에 합의할 경우 6자 회담의 전망이 밝아질 수 있다고 이 중국 전문가는 예상했다. 두 번째 단계인 3차 6자 회담에서는 이를 발판으로 △6자 회담 참여국들이 북한에 대해 집단적으로 안전 보장을 약속하고 △북한은 이에 대해 문서로 핵 포기를 선언함과 동시에 핵확산방지조약(NPT)에 복귀하는 상응 조처를 취한다고 되어 있다.

이 경우 미국 역시 △북한에 대한 외국의 투자 및 경제 협력을 방해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고 △북·미 연락 채널(연락사무소 포함) 설치에 동의함으로써 대북 적대 정책을 실질적으로 포기하는 조처를 취한다는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 방중 당시 북핵 해법을 위한 로드맵에 합의한 중국 지도부는 이 내용을 한·미·일 3국과 다시 조율한 뒤 5월12일로 예정된 제3차 6자 회담 실무회담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이미 닝푸쿠이 중국 외교부 북핵 대사가 한·미·일 순방(한국은 4월29일~5월1일, 미국은 5월2~4일, 일본은 5월5~6일)에 나섰다. 위 중국 전문가는 닝푸쿠이 대사가 이번에 한·미·일 정부와 논의할 것이 바로 위와 같은 내용이라고 말했다.

<시사저널>은 북·중 최고 지도부가 마련한 이 북핵 해법 로드맵이 제3차 6자 회담까지 한반도 정세를 좌우할 것으로 판단하고, 그 상세한 배경을 중국 소식통의 전언과 베이징·워싱턴에 대한 보충 취재를 통해 재구성했다.

제 1단계의 핵심은 북한의 핵 사찰 수용: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해 북핵 문제와 관련해 대담한 구상을 밝힐 것이라는 관측은 그동안 계속 있어 왔다. 최근 베이징의 대북 소식통은 그 구체적 내용이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라는 것이다’라고 일보를 전해왔다. 이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접촉하게 된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는 핵사찰 수용 논의가 나온 배경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즉 체니 미국 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4월13~15일) “북한이 핵을 동결하겠다고 말로만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 핵 사찰을 통해서 동결했는지 여부를 검증해야 한다”라고 먼저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 직후 중국을 찾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중국은 “핵 개발 포기를 구두로만 약속해서는 안된다. 이를 뒷받침할 실질적 행동이 있어야 한다”라며 미국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김위원장은 이에 대해 “우리가 핵 사찰을 받을 경우 미국은 어떤 조처를 취할 수 있나? 우리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라는 것이 우리의 요구다”라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핵 사찰과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맞교환을 주축으로 하는 북핵 해법 로드맵의 골격이 마련된 것이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는 “원래 김위원장은 대담한 구상의 내용으로 핵 개발 포기를 밝히려 했다. 그러나 북·중 사전 조율 과정에서 그것만으로는 미국을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핵 사찰을 수용하게 됐다”라고 확인했다.

그 다음 단계에 대해서는 주로 김위원장이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북한이 다음 단계로 핵 포기 의사를 밝히면 미국은 이에 대해 중유를 제공하고 적대 정책을 변경하겠다고 선언하라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1단계, 즉 3차 6자 회담을 위한 분위기 조성 단계라 할 수 있다.

실무회담에서 중국이 문서로 제시:중국의 한반도 소식통은 3차 6자 회담 실무회담 일정이 일반적인 예상보다 빨리 잡히게 된 것은 체니 부통령 덕분이라고 말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체니 방중 당시 중국은 “중국도 노력하겠지만 미국도 북한에 대해 요구만 하지 말고 성의 있는 행동을 보이라”고 압박했다. 이에 대해 체니가 “중국이 실무회담을 조기 개최한다면 미국도 동의하겠다. 실무회담에서 성과가 나타나면 3차 6자 회담도 빨리 열자”라고 답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미국도 3차 회담에서 성과를 기대하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중국은 닝푸쿠이 대사의 한·미·일 순방을 통해 북·중 최고지도부 합의 내용을 통보하고 조율한 뒤 이를 문서로 정리해 5월12일 3차 6자 회담 실무회담에 제시할 계획이다. 실무회담에서는 이를 토대로 북한 핵 사찰 범위, 고농축 우라늄(HEU) 문제, 테러지원국 삭제 등 쟁점이 될 만한 문제에 대해 ‘끝장 토론’을 벌여 대안까지 마련해 본회담에 상정할 예정이다. 실무회담에서 개·폐막식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제3차 6자 회담과 전망:북·중 최고지도부의 해법안이 사전 조율을 거쳐 본회담으로 순조롭게 넘어갈 경우 이번 제3차 6자 회담에서 획기적 진전이 있을 수 있다고 중국 소식통은 밝혔다. 이번 3차 6자 회담의 예상 합의 내용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북한이 미국에 의한 대북 안전보장보다는 6자 회담 참여국의 집단 안전보장을 선호하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는 ‘북한이 집단적 안전보장이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핵 포기에 대한 상응 조처로서 한국이나 일본·유럽연합 등의 대북 투자를 미국이 방해하지 말라고 요구했다는 점은 북한이 최근 보이는 실용주의적 자세를 반영하고 있다. 북·미간 연락 채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섬으로써 그동안 중단되어 온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 논의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한편 북한이 요구하는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와 관련해, 미국 국무부는 지난 4월29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명하면서, 그 주요 근거로 일본인 납치 문제를 들었다. 이에 따라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의 최대 관건인 일본인 납치 문제를 둘러싼 북·일 교섭의 중요성이 부각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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