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권력 이동 전모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8.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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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부문 확보, 정몽헌과 막상막하 이뤄
현대그룹이 기아자동차를 낙찰한 지난 10월, 현대그룹 경영권을 누가 쥘지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 벌어졌다. 현대그룹측이 나서서 정몽구 회장이 기아 인수전을 진두 지휘해 왔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린 것이다. 정회장이 기아 인수와 관련해 경영진 회의를 주재하는 사진도 곁들여 공개했다.

그동안 현대그룹이 보인 태도를 감안할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언론이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과 정세영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간에 경쟁 또는 갈등이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것에 늘 불만을 드러내 온 현대가 세간의 추측을 부채질할 만한 언론 플레이를 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후부터 줄곧 현대그룹은 기아 인수 과정에서 정몽구 회장의 역할을 강조했다.

MK그룹에 알짜 기업 얹어줘

지난 12월3일 공식 발표된 인사로 인해 기아를 포함해 그룹내 자동차 산업을 맡고 싶다는 정몽구 회장의 꿈이 현실화했다. 한마디로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으로부터 추인을 받은 셈이다. 이 날 정몽구 회장은 기아자동차를 인수한 현대자동차의 총괄 회장에 취임했다. 그동안 현대자동차를 이끌어 온 정세영·정몽규 부자(父子)는 각각 이사회 의장과 부회장으로 물러앉았다. 그러나 이 날 인사의 배경을 설명한 현대그룹 관계자들은 “정몽구 회장과 정세영 일가가 자동차산업을 공동 경영하게 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인사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이같은 공식적인 설명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인사는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현대그룹의 구조 조정 계획과 관련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대그룹이 추진하는 구조 조정 계획의 핵심은 앞으로 60여 개에 이르는 계열사를 35개 정도로 대폭 축소하고, 그룹을 5개 정도의 업종별 소그룹으로 쪼갠다는 것이다(아래 표 참조).

이런 구조 조정 계획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이른바 ‘MK(몽구의 영문 머리 글자) 그룹’의 위상이다. 정몽구 회장이 거느린 주요 계열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현대정공·현대산업개발·현대강관·현대자동차써비스·인천제철 등으로 수익성과 성장성 면에서 보면 다소 문제가 있는 기업들이 주축을 이룬다. 정몽헌 공동 회장의 영향권 안에 있는 계열사들이 주로 현대그룹의 모체 기업들이거나 성장성이 큰 기업들인 것과는 대조적이다.“그동안 적자(嫡子) 기업의 체통이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지분 정리 작업에 참여해 온 현대그룹 종합기획실 관계자의 말이다. 그룹 성장 과정에서 일부 계열사를 떼어 주면서 동생들을 분가시켰던 정주영 명예회장으로서는 자식들의 분가를 앞두고 이 대목이 못내 걸렸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현대그룹 경영권의 향배는 어떻게 될까. 현대그룹 관계자들은 정몽구·정몽헌 두 회장이 서로 다른 업종의 계열사들을, 서로 비슷한 비중으로 맡게 된 만큼 그룹 총수의 의미가 크게 퇴색할 것으로 본다. 현대의 소그룹별 분할 계획에는 정부 요구를 수용해서 다른 업종 간의 상호 출자나 지급 보증을 완전히 해소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청와대 정·재계 간담회에서 확정된 5대 그룹 구조 조정 합의문에는, ‘현대의 경우 형제간 분할에 따른 계열사 분리·독립을 추진한다’고 못박혀 있다. 그렇게 되면 정씨 형제들은 서로 독립적인 경영을 할 수 있다. 특히 5대 주력 업종 가운데서도 금융·서비스 업종은 내년 초 그룹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갈 가능성마저 있다.

정작 문제는 현대자동차를 키워 온 일등 공신인 정세영 명예회장과 정몽규 부회장에게 어떤 대우를 해줄 것이냐 하는 점이다. 구구한 억측이 돌고 있지만 현재는 그룹으로서도 ‘공동 경영’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시간을 버는 수밖에는 묘안이 없는 상태다. 인사가 확정되고 난 다음날 고려대 총동문회 회장 자격으로 동문회에 참석한 정세영 명예회장은 기운이 빠진 모습이었고, 정몽규 부회장은 8일 미쓰비시 사를 방문한다며 일본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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