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대통령’들의 허망한 뒷모습
  • 전상인 (한림대 교수·사회학) ()
  • 승인 1995.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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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집권·비리·축재·권력남용으로 얼룩진 통치사…뒷북만 쳐온 검찰·언론에도 책임
인터뷰의 귀재로 알려진 미국의 앵커우먼 바버라 월터스는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정치가라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그런 점에서는 정치인 자격이 있다. 그런데 지난 10월27일 이른바 ‘통치 자금’과 관련한 기자회견장에서 그의 눈에 이슬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악어의 눈물’이었다.

7년 전 늦가을, 전두환 전 대통령도 비리와 축재에 연루되어 국민에게 사과하고 백담사로 떠났다. 선량한 국민들 가운데는 전씨와 노씨의 스타일을 비교하면서 후자에게 더 큰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며 권력을 훔쳤고, 굶주린 늑대처럼 직위를 남용한 점에서 ‘초록은 동색’일 뿐이다.

국민 가슴에 또다시 피멍

요즈음 16년 전 이맘 때 궁정동 안가의 피비린내가 텔레비전에서 부활하고 있다. 양쪽에 여자를 끼고서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기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을 겪지 않아 차라리 행운일까? 그리고 그의 후임자인 최규하 전 대통령은 실어증 환자처럼 입을 다물고 유폐 생활을 자청하고 있다. 입이 무거운 것인가, 죄가 무거운 것인가. 12·12 앞에 선 최씨는 “올 것이 왔다”며 5·16을 맞은 윤보선 전 대통령과 ‘초록’을 이루는 또 하나의 커플이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거대한 생애’ 90년을 유배지나 다름없는 하와이에서 마감했다.

광복 50주년을 맞이한 올해 연초에 국내의 한 유수 일간지는 청와대 앞뜰에 나란히 선 전·현직 대통령 일곱 명을 사진으로 합성했다. 그러면서 한국 현대사를 자괴하고 역대 대통령을 폄하하는 시대적 풍조를 개탄했다.

그 신문은 역사의 축적과 발전을 믿자고 했다. 그런데 미처 한 해도 못 가 우리의 대통령들은 이번 노태우씨 사건을 계기로 국민의 가슴에 다시 한번 피멍이 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대통령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부끄럽지 않는 대통령만 되어도 국민은 진심으로 감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노씨의 부정과 비리 때문만이 아니다. 대통령과 재벌들 사이에 검은 돈이 거래되고 정치인들이 비자금을 모으고 나눠 쓰는 따위의 관행이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이번에 금시초문으로 접한 국민이 과연 어디 있을까. 우리를 더욱 슬프게 만드는 것은 그동안 이를 다 알고도 모르는 척 해온 우리 스스로의 위선과 이중성이다.

그리고 가증스러운 것은 이러한 우리 사회의 ‘상식’을 이번에 마치 처음 알게 되기나 한 것처럼 노씨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열심히 뒷북을 쳐대는 검찰과 언론이다. 사실 우리는 늘상 당하면서도 위정자들에게 관대했으며, 상처받은 마음을 매번 관·언(官言) 합작의 즉흥적 카타르시스에 씻고 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실로 무서운 것은 지금까지가 아니라 지금부터다.

우리는 이번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부끄럽지 않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는 최소한의 국민적 기대를 높일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그에 대한 사법 처리나 언론 재판 모두를 우려하고 불신한다. 우선 법이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곧 정의는 아니다. 그것은 정의의 일부일 뿐이며 가끔은 정의와 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참을성 많은 국민’

또한 언론에 투영된 여론이 곧 진실은 아니다. 그것은 진실의 일부일 뿐이며 가끔은 진실과 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패륜적 쿠데타 행위에 대한 검찰의 면죄부 발급이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면, 5·18 특별법 제정을 바라는 국민적·시대적 여망을 외면하고 있는 ‘무관의 제왕’들도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김영삼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의 ‘추악한’ 반열에 낄 것인가 말 것인가는 남은 임기내 그가 하기에 달렸다. 아니 그렇게라도 믿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일지 모른다.‘세상에서 가장 참을성이 많은 사람’은 노태우씨가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세계사는 사람들이 정의와 진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실현해 왔음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다같이 유념할 때다. 대통령은 국민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좋은 대통령을 가질 행운이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럴 권리는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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