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차관급 회담, 지속적 대화 통로 개통
  • 南文熙 기자 ()
  • 승인 1998.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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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남 자체만으로 큰 의미…“북측, 미국 의식해서라도 기피하기 힘들 것”
베이징 남북 차관급 회담은 3년 9개월여 만에 비로소 남북 당국 간에 대화 채널이 열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대화 채널 재개라는 점에서 보면 이번 회담의 주의제인 비료 지원과 이산 가족 상봉 문제는 각론적 중요성밖에 가지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회담이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해도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현시점에서는 너무 큰 기대를 가졌다가 금방 실망하고 마는 조급증이 더욱 위험하다고도 할 수 있다. 회담이 난관에 봉착했던 지난 4월13일 오전 통일부 고위 당국자가 ‘너무 큰 기대만 가지지 않는다면 이번 회담은 잘 진행되어 온 셈이다’라고 지적한 것이나, 정부 일각에서 ‘비료 지원 대가로 이산 가족 문제가 너무 부각됐다’고 우려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사실 북한 내부의 속사정을 고려하면 이번 회담은 다소 이른 감이 있다. 회담에 임한 북한측 관계자가 “애초 생각보다 당국간 회담이 빨랐다. 경협이 활성화해 신뢰 구축이 어느 정도 진전된 뒤에 하는 게 좋았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고 하는데, 이 발언이야말로 북한측의 속마음을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 대화 재기 시기 빨라져 당혹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은 그동안 새 정부의 다양한 대북 제의에 대해 복합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몇 차례에 걸친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의 발언을 통해 원론적으로 긍정적 입장을 천명하기는 했으나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아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애를 태웠다. 북한이 이같은 애매한 입장을 취한 데에는 나름으로 이유가 있었다.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은 한국 정부의 다양한 제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다. 그러나 본격적인 대화 시기를 가늠하는 데에는 매우 신중한 모습을 보여 왔다”라고 지적했다. 이 소식통에 의하면 북한은 새 정부 출범 후 약 3개월 정도 지켜보면 어느 정도 새 정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정부 출범 이후의 갖가지 정치적 사건들을 보면서 이 시기를 6개월로 연장했다고 한다. 즉 이 기간에 새 정부가 국내 보수 세력의 저항을 뚫고 그동안 내놓은 다양한 대북 제의를 관철할 역량이 있는지 신중하게 따져보겠다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스티브 린튼 유진벨 재단 이사장도 이와 같은 견해를 나타냈다.

따라서 이번 베이징 회담은 북한이 아직 남북 대화 재개 시기에 대한 총론적 입장을 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급한 비료 문제 해결을 위해 임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북한이 대화 자체는 내심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시기 문제를 저울질해 온 것이 사실이라면, 이번 회담은 어떤 이유에서든 북측 수뇌부의 결심을 앞당기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대화를 시작해놓고 이를 흐지부지할 경우 그 다음에 올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북한이 앞으로 일정 수준에서 남북 대화에 계속 임할 것으로 보는 데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국과의 관계 때문이다. 미국은 최근 주한미군의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를 지렛대로 해 북한측에 긴장 완화 조처를 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같은 협상 전략은 군사력 증강이라는 압력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협상 스타일과도 매우 다르다. 미국은 주한미군이 계속 증강되는 것을 막으려면 북한이 우선 남북 대화에 임하고 그 다음 군축에 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측은 이미 이같은 입장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북한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북한이 최근 남북 대화 의사를 거듭 천명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이 만약 남북 대화를 포함한 긴장 완화 조처를 거부한다면, 한국에 증강되는 미군과 군비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 80년대 이후 한국과의 군비 경쟁도 포기한 북한이 자신들에게 일정 부분 도움이 될 남북 대화를 거부한 채 미군을 상대로 군비 경쟁에 재돌입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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