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사할린 노부부의 망향 50년
  • 사할린 아니바 시·李文宰 기자 ()
  • 승인 1995.08.3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갑석·박순옥씨, 추석에 고향 방문
이사진 너머는 바다다. 저 바다는, 1945년 8월15일, 조선인이, 일본 신민이 아니고 조선인이라고 울부짖으며,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고향으로 가야 한다고 집결하던 사할린 남쪽 항구, 코르샤코프와 맞닿아 있는 아니바 만, 그 푸른 바다다.

저 노부부 가운데 왼쪽 할아버지가, 조선을 조선이라고 말할 때, 그곳은 이미 조선이 아니었다. 남편 이갑석옹(84)은, 1940년 충북 보은에서 돈을 벌기 위해 사할린으로 온, 결혼해서 혼자 온 ‘독신’이었다. 부인 박순옥씨(74)는 1948년, 강원도 고성에서 남편과 함께 사할린 주 천도(千島·쿠릴) 열도로 ‘파견’나온 ‘북조선 인민’이었다. 첫 남편은 사하린에 와서 세상을 떠났다.

저 사진 너머는 바다다. 일제하 조선 청년과 처녀 들이 망향하며 눈물을 떨구던 바다다. 그 때 조선은 하나였다. 타향에서 타향을 삶으로써 죽음을 견딜 때, 고향은 갈라서서 싸웠고, 싸워서 또 지독하게 갈라섰다. 그 갈라섬으로 인하여, 고향은 발설할 수 없는 금기였다. 꿈에라도 가고 싶은 고향이 그러했으니, 이곳 타향은, 고향 그리워하는 마음을 더 옥죄 오던, 감옥, 감옥이었다(50쪽 특집 기사 참조).

박순옥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고향에 전쟁이 났다구요?”라고 되묻는다. 6·25를, 고향의 분단을, 40여 년 넘어서도 모른다. 할머니는 그동안 앞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다듬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나, 여기 스물여섯에 왔다. 탄광에서 일하다 이곳 산판으로 왔다,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할린의 광복 50주년은 본토와 ‘시차’가 이렇게 극심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국적을 간직해온 할머니, 고향에 가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50년을 혼자 살아온 할아버지. 두 노인은 심심할 때 서로 ‘여보’ ‘당신’ 하고 부른다고 한다. 서로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서로가 여보 당신인 것인지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듯이. 사할린 아니바 만, 아니바 시에도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올 9월에 둘이 서울 갑니다”라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